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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재형 시인 / 사소한 질문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2.

조재형 시인 / 사소한 질문

 

 

  누가 저 달을 하늘에 가두었나

  밤하늘에 귀를 기울이는 건

  절규를 그리워하기 때문인가

 

  나무 아래 벗어놓은 낙엽들이 있고

  바람이 짝을 맞추어 11월을 신고 간다

 

  의자는 다리가 부러져 휴식을 얻는 것인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때

  비로소 자신에게 돌아갈 수 있는가

 

  하늘에서 날아와 웅크리고 있는

  응달 속 깃털들에게

  누가 맨 처음 함박눈이라고 호명했지

 

  나는 시간이 쏘아올린 탄생

  언제까지 날아가 어디쯤에서

  죽음의 과녘에 적중할까

 

  도끼가 나무를 내리찍는다

  도낏자루도 본래 나무였는데

  누구의 포섭으로 나무꾼에게 전향했을까

 

  누군가 나를 두리번거린다

  내 안에 가둔 당신을 들켰나

 

시집 『누군가 나를 두리번거린다』(포지션, 2017) 중에서

 

 


 

 

조재형 시인 / 상보

 

 

  한 노인이

  십 년 동안 기르던 고독에게 물렸다

  고독을 낡은 소유물이라고들 하나

  언제든지 주인을 공격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노인은 한 개의 뼈다귀로 발견되었다

  가슴에 박힌 못을 근거로

  고독에도 이빨이 있다는 게 증명되었다

  스산한 바람 몇 점이 수거되었으나

  사채(私債)는 쉬 발견되지 않았다

  굳게 닫힌 골목을

  냄새가 활보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계간 『애지』 2017년 가을호 발표

 

 


 

 

조재형 시인 / 너는 치외법권이다

 

 

  나는 봉인되었다

  너, 라는 담보물 속에

  나는 해제될 수 없다 네 목소리가 아니면

  약속이 무산되어도

  그것으로 나의 말은 완성되었다

  너를 목적지로 정했으니

  내 사유는 너에게로 가는 이정표

  나를 호송하는 시간들은

  너를 세우려고 파산 중이니

 

  맨 처음 잔물결인 너는

  별안간 해일로 덮쳐 온다

  파고를 받아 적으려고

  해안선은 송두리째 포구를 위반 중이다

  너를 탈고하기 위해

  별책 부록 같은 여* 하나 내 안에 가두고

  밤새워 형기를 심리 중이다

 

* 여 :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

 

계간 『포지션』 2017년 겨울호 발표

 

 


 

 

조재형 시인 / 신지식인

 

 

  나는 알고 있습니다

  목숨 한 그루 꺾는데 몇 발의 저주가 필요한지

  하지만 나는 모릅니다

  기도를 사다리로 사용하면 신이 낮은 데로 임할 수 있는 줄은

 

  나는 알고 있습니다

  적의 심장을 초토화시키는데 충분한 플루토늄의 양을

  하지만 나는 모릅니다

  사계절을 지키는 민들레의 노란 전구를 누가 켜놓았는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말을 비수로 꽂으면 라이벌이 폭삭 무너지는지

  하지만 나는 모릅니다

  숲속의 새들은 어디서 울음을 채워 오는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조명을 낮추고 어떻게 흥정을 붙여 노래방의 치마를 벗기는지

  하지만 나는 모릅니다

  갈대가 어떻게 바람과 협치하여 가을 한 철을 저술하는지는

 

  나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겁박으로 무지한 의뢰인들의 지갑이 몽땅 털리는지

  하지만 나는 모릅니다

  별들이 어떻게 한 눈금의 좌표도 엇나가지 않고 온밤을 설계하는지는

 

웹진 『시인광장』 2018년 4월호 발표

 

 


 

 

조재형 시인 / 묵독

 

 

  당신을 읽는 중입니다

  읽을수록 손을 놓을 수 없습니다

  가슴을 열람하고

  옆구리를 빌립니다

  모음으로 된 당신의 뼈

  자음으로 된 당신의 살

  감탄 부호로 찍힌 음성

  수억의 관문을 뚫고 입성한 내가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당신을 열독한 일입니다

  언제일까요

  폐문을 맞이하는 날

  이별을 박차고 이 별을 나설 테지만

  당신이라는 양서를 택한 나는

  우등 사서(司書)입니다

  누군가 당신을 복사할까봐

  차마 낭독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당신을 외웁니다

 

시집 『누군가 나를 두리번거린다』(포지션, 2017) 중에서

 

 


 

조재형 시인

2011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지문을 수배하다』(지혜, 2012)와 『누군가 나를 두리번거린다』(포지션, 2017)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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