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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사라 시인 / 얼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2.

이사라 시인 / 얼룩

 

 

  검버섯 피부의 시간이 당신을 지나간다

 

  시간을 다 보낸 얼룩이 지나간다

 

  날이 저물고 아픈 별들이 뜨고

  내가 울면

  세상에 한 방울 얼룩이 지겠지

 

  우리가 울다 지치면

  한 문명도 얼룩이 되고

 

  갓 피어나는 꽃들도 얼룩이 되지

 

  지금 나는

  당신의 얼룩진 날들이 나에게 무늬를 입히고

  달아나는 걸 본다

  모든 것을 사랑하였어도

  밤을 떠나는 별처럼 당신이 나를 지나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라진 문명이 돌연 찾아든 것처럼

  내 벽에는 오래된 당신의

  벽화가 빛나겠지

 

  천년을 휘돌아온 나비가 찾아들고

 

  다시 한바탕 시간들 위로 꽃잎 날리고

  비 내리고 사랑하고 울고 이끼 끼고

 

  나의 얼룩도

  당신처럼 시간을 지나가겠지

 

시집 『훗날 훗사람』(문학동네, 2013) 중에서

 

 


 

 

이사라 시인 / 유적지 돌바닥을 걷다

 

 

  대리석 바닥을 문지르고 간 사람들이

  사라진 뒤

  한낮의 유적지 돌바닥이 반질반질하다

 

  한참을 살다가 사라진 사람 대신 돌바닥이 윤이 난다

  또 하나의 빛이 바닥에서 올라온다

 

  뒤늦게 드러나는 것들

  살다보면 이렇게 보인다

  바닥을 사랑하다보면

 

  하늘 어디선가에서 굴러 떨어진 듯

  오래된 기둥들이 척추이기를 포기하고

  붉은 번호로 낙인 찍혀

  시간의 사체처럼 누워버린 것들도 보이고

  언젠가 부활하게 될 붉은, 핏빛의 여유로운 숙면

 

  오랜 세월의 혀끝은 쓰다

  뭉클하게 써도

  사라진 것들이 돌아올 길에서

  몸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빛이

  내게도 서서히 다가오는

  이런 날

 

  우리가 발바닥으로 느끼며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시집 『훗날 훗사람』(문학동네, 2013) 중에서

 

 


 

이사라 시인

1953년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와 同 대학원을 졸업. 1981년 《문학사상》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히브리인의 마을 앞에서』,『미학적 슬픔』,『숲속에서 묻는다』,『시간이 지나간 시간』,『가족박물관』이 있음. 1989년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 현재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