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라 시인 / 얼룩
검버섯 피부의 시간이 당신을 지나간다
시간을 다 보낸 얼룩이 지나간다
날이 저물고 아픈 별들이 뜨고 내가 울면 세상에 한 방울 얼룩이 지겠지
우리가 울다 지치면 한 문명도 얼룩이 되고
갓 피어나는 꽃들도 얼룩이 되지
지금 나는 당신의 얼룩진 날들이 나에게 무늬를 입히고 달아나는 걸 본다 모든 것을 사랑하였어도 밤을 떠나는 별처럼 당신이 나를 지나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라진 문명이 돌연 찾아든 것처럼 내 벽에는 오래된 당신의 벽화가 빛나겠지
천년을 휘돌아온 나비가 찾아들고
다시 한바탕 시간들 위로 꽃잎 날리고 비 내리고 사랑하고 울고 이끼 끼고
나의 얼룩도 당신처럼 시간을 지나가겠지
시집 『훗날 훗사람』(문학동네, 2013) 중에서
이사라 시인 / 유적지 돌바닥을 걷다
대리석 바닥을 문지르고 간 사람들이 사라진 뒤 한낮의 유적지 돌바닥이 반질반질하다
한참을 살다가 사라진 사람 대신 돌바닥이 윤이 난다 또 하나의 빛이 바닥에서 올라온다
뒤늦게 드러나는 것들 살다보면 이렇게 보인다 바닥을 사랑하다보면
하늘 어디선가에서 굴러 떨어진 듯 오래된 기둥들이 척추이기를 포기하고 붉은 번호로 낙인 찍혀 시간의 사체처럼 누워버린 것들도 보이고 언젠가 부활하게 될 붉은, 핏빛의 여유로운 숙면
오랜 세월의 혀끝은 쓰다 뭉클하게 써도 사라진 것들이 돌아올 길에서 몸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빛이 내게도 서서히 다가오는 이런 날
우리가 발바닥으로 느끼며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시집 『훗날 훗사람』(문학동네, 2013) 중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제니 시인 / 고아의 말 외 1편 (0) | 2019.08.02 |
---|---|
김점용 시인 / 달마도를 걸다 외 1편 (0) | 2019.08.02 |
조재형 시인 / 사소한 질문 외 4편 (0) | 2019.08.02 |
김유섭 시인 / 도둑들 (0) | 2019.08.02 |
강지희 시인 / 서식지 (0) | 2019.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