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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숙 시인 / 기울어짐에 대하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2.

문숙 시인 / 기울어짐에 대하여

 

 

  친구에게 세상 살맛이 없다고 하자

  사는 일이 채우고 비우기 아니냐며

  조금만 기울어져 보란다

  생각해보니 옳은 말이다

 

  노처녀였던 그 친구도 폭탄주를 마시고

  한 남자 어깨 위로 기울어져 짝을 만들었고

  내가 두 아이 엄마가 된 것도

  뻣뻣하던 내 몸이 남편에게 슬쩍 기울어져 생긴 일이다

  체 게바라도 김지하도

  삐딱하게 세상을 보다 혁명을 하였고

  어릴 때부터 엉뚱했던 빌게이츠는

  컴퓨터 신화를 이뤘다

  꽃을 삐딱하게 바라본 보들레르는

  악의 꽃으로 세계적인 시인이고

  노인들도 중심을 구부려

  지갑을 열듯 자신을 비워간다

 

  시도 돈도 연애도 안 되는 날에는

  소주 한 병 마시고 그 도수만큼

  슬쩍 기울어져 볼 일이다

 

시집 『기울어짐에 대하여』(애지, 2012) 중에서

 

 


 

 

문숙 시인 / 허상(虛像)

 

 

  까치 한 마리가 눈밭에서 눈을 쪼고 있다

  작은 발자국을 남기며 무엇을 찾고 있다

 

  하얀 쌀알 같은 모습에 이끌려 다닌다

  허기 앞에 고개를 숙이느라 날갯짓을 잊고 있다

 

  눈을 쪼던 부리에는 물기만 묻어난다

  헛된 입질에도 마음을 멈추지 않는다

 

  내가 하는 짓이 저렇다

 

시집 『기울어짐에 대하여』(애지, 2012) 중에서

 

 


 

문숙 시인

경남 하동 출생으로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 2005년 「서울문화재단」 신진작가 지원금을 수혜. 시집으로 『단추』(천년의시작, 2006)와 『기울어짐에 대하여』(애지, 2012)가  있음. 계간 『불교문예』 편집장과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동국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