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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은숙 시인 / 갈참나무 숲으로 가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3.

김은숙 시인 / 갈참나무 숲으로 가자

 

 

  나의 사랑은 늘 불온하였다

  견뎌내거나 견뎌내지 못한 시간이

  시월의 저녁 아래 낮게 엎드리고

  갈참나무 매달린 저 작은 열매가

  이 계절의 정수리에 아프도록 빛난다

  굳어버린 생채기만 단단한 옹이로 키우며

  어설픈 열매조차 맺지 못한 내 불온한 사랑은

  저녁 갈참나무 숲에 와서 무릎을 꿇는다

  그대여 나여 지나간 사랑이여

  갈참나무 저 작은 도토리처럼

  떫은 몸 스스로를 몇 번이고 씻어내며 지워

  거친 밥상 따뜻하게 채우는 양식이 되거나

  해거름 쓸쓸한 가지로 날아드는 새에게

  푸근한 둥지 자리조차 내어주지 못한

  척박한 묵정밭의 생애여

  시월의 저녁 지금도

  붉나무 잎새는 눈부시게 더욱 붉어지고

  넉넉한 과즙의 사과 익어가며 수런거리는데

  후줄근히 구겨진 내 사랑의 허물은

  갈참나무 숲에 쌓인다

 

계간 『다층』 2002년 겨울호 발표

 

 


 

 

김은숙 시인 / 가시연꽃

 

 

  팔월 연지(蓮池)에 가라

  연잎 그늘 아래

  맨 마지막 마음까지 목을 내리고

  구름도 슬며시 등을 기댄다

 

  늦은 허기 덤불이 되어버린

  마음 길섶을 쓰는 사이

  그렇게 저물고 놓아버리는 것들이

  뒤척이기도 하고

  울음이며 통증 같은 것들이

  따갑게 일어서기도 하는데

  주름진 이파리는 푸른 경전을 읽어간다

 

  팔월 연지蓮池에 가라

  따끔하게 돋아나는 서슬 푸른 목소리

  하늘마저 물밑으로 곤두박질쳐도

  가시 돋은 꽃자루 제 몸의 어둠 물고 환해지며

  자줏빛 서원 세운 가시연꽃 부처로 피고

 

  귀밑머리 하얗게 묵은 소리들

  불현듯

  가시연 오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계간 『시작』2004년 여름호 발표

 

 


 

김은숙 시인

충북 청주에서 출생. 충북대학교 국어교육과 및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1998)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창밖에 그가 있네』(다층, 2001),『아름다운 소멸』(천년의시작, 2003),『손길』(천년의시작. 2007)이 있음. 제13회 내륙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