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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재혁 시인 / 딴생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3.

김재혁 시인 / 딴생각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한 발짝 떼어놓을까. 가만있을까. 다 그만둬. 딴생각이 펼쳐놓은 마당가 바지랑대에 잠자리가 앉았습니다. 잠자리의 눈이 닿는 곳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사는 일은 역시 팍팍합니다. 저만치 옛사랑이 흘러갑니다. 옛사랑은 비안개에 젖어 있습니다. 또 한 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그냥 마구 걸어갈까. 다 그만둬. 멀리 가로등불빛이 안개 속에서 숨을 고릅니다. 술래의 등 뒤로 딴생각이 펄떡입니다. 길가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누군가가 술래가 되면 딴생각은 그의 등 뒤에서 발걸음을 살짝 죽입니다. 곳곳에 딴생각들이 무궁화꽃을 피웁니다. 사람들 마음마다 몰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시집  『딴생각』(민음사, 2013)에서

 

 


 

 

김재혁 시인 / 인사동 고가(古家)에서

 

 

  고가(古家)는 과거로 통하지 않는다

  고가는 주름살을 지우고 차(茶)를 나른다

  고가의 방문은 모두 닫혀 있고 골마루에선

  조선(朝鮮)일보 문화부 기자가 차를 마신다

  조선일보는 조선시대 신문이 아니다

  과거의 눈을 감은 고가는 푸른 대나무를 품고 있다  

  이제 대나무는 절개를 상징하지 않는다

  절개는 현재의 것이 아니다 대나무는

  봄바람에 잽싼 몸놀림을 한다

  떨어지던 햇살도 날렵하게 움직인다

  기왓장의 주름 속에는 참새 집도 없으며

  시간의 센 머리카락은 검게 물들여져 있다

  옛날의 기억은 괄호 안에서 먼지에 쌓여가고

  현재의 고가는 괄호 밖에서 차를 나른다

  조금 있으면 모든 게 완전히 현재가 되리라

  서울시가 이 터에 고층 빌딩을 짓기로 했으므로

  고가는 고가(高價)에 팔렸다 고가를 소유한

  사람은 이 괄호 안에서 춤을 출지도 모른다

  알지 못할 미래는 바람만이 수확할 것이다

 

시집  『내 사는 아름다운 동굴에 달이 진다』(세계사, 2006)에서

 

 


 

김재혁 시인

1959년 충북 증평에서 출생. 1994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내 사는 아름다운 동굴에 달이 진다』, 『아버지의 도장』, 『딴생각』 등이 있음. 현재 고려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