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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재운 시인 / 블러그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3.

홍재운 시인 / 블러그들

 

 

숫자 5는 아크릴 화 같은 집이다 언제든 다시 지을 수 있는 젯소바닥, 젯소기둥, 젯소심장이 있다 숫자 5는 두 번째 갈비뼈 사이에 에녹서와 보르헤스를 겹쳐놓았다 별들의 강물 속을 유영하는 숫자 5는 기포처럼 떠다니는 아바타들의 블루마운틴이다 아바타들이 모자이크하는 블루마운틴은 언어박물관으로 자막을 흘려보낸다 숫자 5가 흰 화살표는 아니지만 메트로놈 식으로 말하자면 일정한 구름문장이 필요하다 일정한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고 일정한 수면장애, 일정한 낯섦, 일정한 친숙함으로 휘감기는 이 방은 비밀번호가 없다

 

비밀번호가 없는 언어의 방, 어떤 집은 더 많은 배경과 완벽한 설계도 혹은 조감도를 선호한다지만, 검은 사각형 속의 검은 사각형은 무중력 공간으로, 무중력 공간으로, 언어들은 이동하고, 이동하고, 이동한다 녹색감정이 자라는 아바타들의 방, 감정의 연대기가 사라진 지붕과 기둥은 알루미늄이다 물감을 덧칠한 가면이다 안부와 안부가 서로 환승하는 추가한 이웃들이 새 가계를 이루는 수 만개의 기포들, 정물화 같은 숫자들, 때로는 티베트의 포탈라 궁 같은 이 거룩한 방들은

 

계간 『예술가』 2013년 봄호 발표

 

 


 

 

홍재운 시인 / 안개나무여자

 

 

초점이 맞지 않는 강물은 예뻤다 지워진 발목을 찾아가는 안개나무도 예뻤다 목을 길게 늘여도 보이지 않는 물속에서 그녀는 수장된 봄과 함께 예뻤다 벼랑의 투신이 파랗게 멍들어 더 더욱 예뻤다

 

비는 내리고

금요일은 금요일 창가에 쌓이고

빗방울은 잡아도 속절없이 쌓이고

지금이 다시 지금으로 건너와 건너온 자리마저 쌓이고

새가 날아간 쪽으로 강의 내부가 묻히고

불가능해지고

 

먼 길을 달려온 문장의 눈빛은 젖고 있겠다 몽환은 잡아도 속절없이 풀어지겠다 나무의 귀를 끌어당겨 물어도 보고 젖어 보기도 하겠다 꽃 진 자리, 검은 동공으로 일렁이겠다 독한 술처럼 허리에 잠겼던 혀들도 검어지겠다

 

초점이 맞지 않은 물결은 깊어지고

굽은 등마저 깊어지고

잿빛, 달그락거리는 소리 깊어지고

조약돌마저 깊어지고

 

먼 길을 달려온 먼 길의 새벽은 예뻤다 늘어나는 손톱이 예뻤다 우물같이 먼 입술이 예뻤다 천개의 깜깜한 배꼽, 등 뒤에서 풀어지는 크림빛 생각이, 아슬 한 침묵이 예뻤다 등뼈가 녹아 안개의 이름을 가진 나무는 예뻤다

 

잡았던 손목이 지워지는

속절없이 허공을 따라 걷는

멀어지거나 멀어지지 않는 나무, 나무여자

 

월간 『현대시학』 2013년 9월호 발표

 

 


 

홍재운 시인

2005년 계간 《시와 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정자역 지나 오리역에도 비가 흐른다』와 『붉은 뱀을 만나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