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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광규 시인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3.

김광규 시인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을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문학과지성사, 1979) 중에서

 

 


 

 

김광규 시인 / 홰나무

 

 

밤마다 부엉새가 와서 울던 그 나무를 동네 사람들은 홰나무라고 불렀다.  홰나무는 우물가에 넓은 그림자를 던져주었다. 두레박이 없어지고, 펌프가 생기고, 뒤이어공중 수도가 설치되었던 그 자리에 얼마 전에는 주유소가 들어섰지만, 홰나무는 오늘도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

 

6.25 때는 홰나무 아래 폭격 맞은 군용 트럭의 잔해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고철 장수가 쓸 만한 부속품들을 뜯어간 뒤,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어버린 그 커다란 쇳덩어리는 3년 가까이 시뻘겋게 녹이 쓸다가 마침내 해체되어 사라졌다  홰나무에도 파편이 몇 개 박혔는데, 그 쇳조각들은 차츰 녹아서 수액으로 흡수되고, 그자리에 옹기가 생겨났다. 언제부터인지 거기에는 자연 보호 팻말이 붙어 있다.

 

홰나무를 바라보면 지금도 그 거대한 나무를 마지고 싶고, 그 나무에 기대고 싶고,기어올라가고 싶고, 때로는 그 나무의 뿌리나 가지가 되고 싶어진다. 그리고 부리나케걸음을 재촉하거나, 택시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갈 때면, 부끄러운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것은 바로 저 홰나무이고 예나 이제나 한자리에 서 있는 것은 정작 나자신이라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시집 『크낙산의 마음』(문학과지성사, 1986) 중에서

 

 


 

 

 김광규 시인

1941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 및 同 대학원 졸업.1975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하여 데뷔. 1983 <귄터 아이히 연구> 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저서로는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아니다 그렇지 않다』, 『크낙산의 마음』, 『좀팽이처럼』,  『아니리』,  『물길』,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처음 만나던 때』, 『시간의 부드러운 손』, 『하루 또 하루』 등 10권의 시집과 『대장간의 유혹』,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누군가를 위하여

 』등 시선집과 영역시집 『Faint Shadows of Love』, 『The Depths of a Clam』, 『A Journey to Seoul』, 독역 시집 『Die Tiefe der Muschel』, 『Botschaften vom gruenen Planeten』, 일역시집 『金光圭 詩集』,  스페인어 시집『Tenues sombras del viejo amor』와 중국어 번역시집 『模糊的旧愛之影』 산문집 『육성과 가성』,  『천천히 올라가는 계단』 등이 있음. 譯書로는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선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하인리히 하이네 시선집, 귄터 아이히 시선집 등이 있음. 오늘의 작가상, 녹원 문학상, 김수영 문학상, 편운 문학상, 대산 문학상, 이산 문학상, 시와 시학 작품상 수상과  2006년도 독일 언어문학 예술원의 프리드리히 군돌프상과 2008년도 이미륵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