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장정자 시인 / 일생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3.

장정자 시인 / 일생

 

 

  꽃피우면서 늙는 나무가 있다

 

  꽃피면서 죽는 나무가 있다

 

  업고 뛰던 메뚜기는 잡혀서도 업고 있다

 

  짝짓기 끝낸 수컷을 암놈 사마귀가 아작아작 먹고 있다

 

  부채질하다 알이 깨어나자 탈진해 죽은 수컷 얼룩동사리

 

  큰가시고기 둥지 지어 천 개의 알을 낱낱이 흔들어주다 파리해져 죽다

  그 다음날 부화된 새끼들 아비를 먹다

 

  까치에게 들킨 꼬마물새 떼 어미, 날개 부러진 척 절뚝절뚝 걷고 있다

 

  물자라 수컷, 등에 잔뜩 실린 알에 눌러 납작하게 헤엄치고 있다

 

  남생이는 파낸 구덩이에 열두 개의 알을 낳았다 여덟 시간이 걸렸다

  긴 산고에 뒷다리가 주저앉아 겨우겨우 우포늪에 몸을 담는 남생이

 

  각시붕어가 긴 산란관을 통해 조개 속에 알을 낳는다 조개를 툭툭 건드려 본 다음이다

 

  바위 구절초도 갓 피어 날 때는 발갛다

 

  나무도 새순 틔울 때는 빨간 액막이칠을 한다

 

시집『뒤비지 뒤비지』(천년의시작, 2008) 중에서

 

 


 

 

장정자 시인 / 가을 우포늪

 

 

  서서히 육탈하고 있었다

  마름 매자기 노랑어리연꽃 생이가래 자라풀들

  깊은 반야경 한 권이 다 풀리고 있었다

 

  가끔 물오리 떼가 끼르륵끼르륵 늪을 친다

  저쪽 물줄기에서 이쪽 물줄기로 끊임없이 흘러오는

  일억 몇 천만 년의 설법들을

  몸소 벗어 보이신 것이다

 

  한쪽 신발을 남겨 놓으시듯*

  여기서부터 야단법석이 차려질 일이다

 

*달마의 무덤에는 한쪽 신발만 있었다

 

시집『뒤비지 뒤비지』(천년의시작, 2008) 중에서

 

 


 

장정자 시인

경남 마산에서 출생. 2001년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뒤비지 뒤비지』(천년의시작, 2008)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