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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보선 시인 / 인중을 긁적거리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3.

심보선 시인 / 인중을 긁적거리며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뱃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 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 뿐이라고 믿어 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보니,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 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삼일, 오일, 육일, 구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 탈무드에 따르면 천사들은 자궁 속의 아기를 방문해 지혜를 가르치고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에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 위해 천사는 쉿, 하고 손가락을 아기의 윗입술과 코 사이에 얹는데, 그로 인해 인중이 생겨난다고 한다.

 

제4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시' 賞 수상시

 

 


 

 

심보선 시인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 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 2008) 중에서

 

 


 

심보선 시인

1970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및 同 대학원, 컬럼비아 대학 사회학 박사과정 졸업.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풍경〉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 2008)와 『눈앞에 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1)이 있음.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 2009년 제16회 김준성 문학상 수상. 제4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시' 賞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