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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상 시인 / 이방인
불멸이 오고 불멸이 떠나가는 순간을 나는 아그네스라 부른다.
눈보라가 망쳐버린 공중, 그곳에서만 무지개는 아름다웠고
달의 하현엔 늘 폐허가 고여 있었다. 그대라는 오해를 사랑하였다.
길흉에 대한 예감은 지도가 아니었으므로 순록은 기별 없는 유목을 마쳤다.
신앙도 신념도 잃은 지 오래인데, 버드나무 안에 우물을 그려두었다.
하루 종일 추운 공중을 바라보다가 사는 일이 불륜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을 모든 이별을 위로하기 위해 바람이 불어온다 쳐도
동쪽은 늘 똑같은 동쪽, 누구나 한 번쯤 그대를 기다린 적이 있다.
번개처럼 천둥처럼 잉태한 아그네스를 나는 사치라 말한다.
눈보라를 걸어 귀향한 순록의 울음, 거울 속의 불면을 간질이고 있다.
계간 『시현실』 2018년 봄호 발표
김은상 시인 / 천칭
새떼들이 날아간 방향이 휘청거린다. 균형을 원하는 것은 천칭이 아니므로 보행자의 공중은 환상통이다. 공중에는 펜트하우스가 없고 동사무소가 없다. 그린카드가 없고 불법체류자가 없다. 그러므로 영공수호는 문명인의 허언증이다. 성층권에 뿌리내린 항공기를 보았던가. 빗방울을 머금고 무럭무럭 자라난 제5 항모강습타격전단을 보았던가. 국가는 사단법인과 같고 인종과 민족은 제의종교와 다르지 않다. 의회가 생활을 법제화하고 사법부가 사유재산을 보호하지만 태초의 지주는 혼돈이다. 국익은 나눌 수 없는 빵이며 인도주의적 지원은 비인도주의적 국익에 대한 변명이다. 죽음의 백조가 선회한 자리에서 공포와 균형이 비이성을 공모한다. 땅에서 멀어진 발이 선악나무를 재배한다. 배 다른 아버지의 혈통들이 예루살렘을 호명한다. 허나 성지의 영광은 세계수에 바쳐진 순결한 제물에 있다. 믿음은 불신의 다른 이름이며 직립은 지구의 불명예이다. 결의에 찬 이성주의자의 취향이 때때로 피의 숭배로 귀결하는 이유이다.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린다. 칼의 판결이 자해에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국가나 민족보다 아름다운 말이지만 난민은 매일매일 탄생한다. 법치주의의 다른 이름은 로펌이다. 판검사는 미래의 변호사이므로 법이 불의를 변호한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는 기회균등의 세계. 공중에는 전관예우가 없다. 새의 날개는 바람을 남용하지 않는다. 빗방울은 구름을 오용하지 않는다. 태풍은 해일을 변호하지 않고 사냥이 취미인 독수리는 더더욱 없다. 로널드 레이건호가 정박할 항구가 없고, 무력에 환호하는 민주시민도 없다. 지켜야 할 것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없으므로. 동맹이나 혈맹은 지상의 주저흔이다. 직립할 수 없는 곳에 성좌가 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뿌리 없는 공중이야말로 천칭이다.
월간 『현대시』 2018년 1월호 발표
김은상 시인 / 하이델베르크
겨울나무 속에서 꽃을 쓴다.
당신이 듣지 못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하이델베르크를 쓴다. 고성을 쓴다.
기도는 무력한 자들의 제의.
그래서 더더욱 아름다운, 눈물 가득한 서가를
괴테의 꽃병을 말할 수 없는 말이 너무 많아서
비워진 은둔자의 성채를 쓴다. 살지 않아도 살아지는
혈액의 뜨거움을 바람에 찍어 당신의 무릎을 쓴다. 하이델베르크로 쓴다.
고대의 화원에서 프리지어와 히아신스로 쓴다.
주름 속에서 놀다 잠든 왕관앵무새의 복화술을.
세상에 없는 신전으로 쓴다. 내일의 비명(碑銘)을 쓴다.
계간 『문학 · 선』 2018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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