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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진은영 시인 / 훔쳐가는 노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1.

진은영 시인 / 훔쳐가는 노래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가난한 아가씨야

 

  심장의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지는 너의 발을 꺼내주지

  맙소사, 이토록 작은 두 발

  고요한 물의 투명한 구두 위에 가만히 올려주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그 자주빛 녹색주머니를 다 줘

  널 사랑해주지 그러면

 

  우리는 봄의 능란한 손가락에  

  흰 몸을 떨고 있는 한 그루 자두나무 같네

 

  우리는 둘이서 밤새 만든

  좁은 장소를 치우고

  사랑의 기계를 지치도록 돌리고

  급료를 전부 두 손의 슬픔으로 받은 여자가정부처럼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나의 가난한 처녀야

 

  절망이 쓰레기를 쓸고가는 강물처럼

  너와 나, 쓰러진 몇몇을 데려갈테지

  도박판의 푼돈처럼 사라질테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고개 숙이고 새해 첫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인들의

  경건하게 긴 목덜미에 내리는

 

  눈의 흰 입술들처럼

  그때 우리는 살아있었다

 

계간 『문예중앙』 2010년 가을호 발표

 

 


 

 

진은영 시인 / 이 모든 것

 

 

  비눗방울 하나가 투명한 기쁨으로 무한히 부풀어 오를 것 같다

  장미색 궁전이 있는 도시로 널 데려 갈 수 있을 것 같다

  겨울과 저녁 사이

  밤색 털 달린 어지러운 입맞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광활한 사랑의 벨벳으로 모든 걸 가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인 것 같다

  배고픈 갈매기가 하늘의 마른 젖꼭지를 심하게 빨아대는 통에

  물 위로 흰 이빨 자국이 날아가는 것 같다

 

  이 도시는 똑같은 문장 하나를 영원히 받아쓰는 아이와 같다

  판잣집이 젖니처럼 빠지고 붉은 달 위로 던져졌다

  피와 검댕으로 얼룩진 술병이 흰 비탈에서 굴러온다

  첫 시집의 변치 않는 한 줄을 마지막 시집에 넣어야 할 것 같다

  청춘은 글쎄…… 가버린 것 같다

  수천 개의 회색 종을 달고서 부드러운 노란 날개 하나

  천천히 날아오르는 것 같다

 

  가난한 이의 목구멍에 황금이 손을 넣어 모든 걸 토하게 하는 것 같다

  초록빛 묽은 토사물 속에 구르는 별들

  하느님은 가짜 교통사고 환자인 것 같다

  천사들이 처방해준 약을 한 번도 먹지 않은 것 같다

  푸른 캡슐을 쪼개어 알갱이를 다 쏟아버리는 것 같다

  안녕, 안녕, 슬레이트 지붕의 부서진 회색 위로 눈이 내린다

  내가 보았던 모든 것이 거짓말인 것 같다

  달에 매달린 은빛 박쥐들의 날개가 찢어져 내리는 것 같다

 

계간 『문학과 사회』 2009년 봄호 발표

 

 


 

진은영 시인

1970년 대전에서 출생.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  2000년 계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과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