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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휘민 시인 / 구렁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1.

휘민 시인 / 구렁이

 

 

십 년 전 집을 새로 지을 때, 집채만 한 굴삭기가 낡은 슬레이트 지붕 허물 때, 그리하여 갑년 지난 들보가 내려앉을 때 내심 걱정을 했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안방 구들장 밑에 똬리 틀고 산다는 구렁이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흙집 무너져 내려 뽀얀 흙먼지로 흩어져도, 검은 구들장 다 드러내도, 웬일인지 구렁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집이 무너진다는 소문을 듣고 다른 곳으로 피해 있었던 것일까요.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리고 오랫동안 구렁이를 잊고 살았습니다.

 

저녁 햇살이 예각으로 기울어져 베란다 문턱을 넘어옵니다. 바람 많은 서향집 양철 지붕은 물매가 싸고, 그 집을 지키던 아버지는 온종일 누워서 하루해를 삽니다. 뒷문 밖에 외상으로 들인 봄볕 깊어진 줄도 모르고 매일매일 천연덕스럽게 잠만 잡니다. 눈싸리꽃*향기 지천에 널려도 콧등 한 번 킁킁거리는 일 없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문득 행적이 묘연해진 구렁이가 생각났습니다. 할머니가 쓰시던 낡은 간장독 뒤에 한 됫박 소금처럼 부려진, 그 성긴 알갱이들이 빚어 놓은 듯 허옇게 떠오른 시름 한 다발, 구렁이는 제 허물을 벗어 간장독 사이에 숨겨 놓고 사라졌습니다. 함부로 몸을 드러내지 않으니 겨울이 오기 전에 집안 어딘가로 스몄겠지요.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날 아침, 늙은 구렁이가 길고 커다란 몸을 이끌고 슬금슬금 내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스스로 열리기 전엔 단 한 번도 길을 내준 적 없는 산도(産道)를 구렁이는 거침없이 거슬러 올라왔습니다. 나는 잠결에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 생애 최초의 오르가슴을, 처녀의 아기집에 들어온 구렁이는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똬리를 틀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늙은 구렁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내 아버지는 밥풀처럼 하얀 조팝나무 꽃을 눈싸리꽃이라 불렀다.

 

시집 『생일 꽃바구니』(서정시학, 2006) 중에서

 

 


 

 

휘민 시인 / 평화방송

 

 

  이런 게 방송국이다

 

  누르지도 않았는데

  엘리베이터는 5층에서 멎는다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검은 정장을 입은 경비원이 정중하게 묻는다

 

  이방인의 신원을 증명하기 위해선

  조직 속의 누군가를 들먹여야 한다

  신분증을 건네자 방문증을 내준다

  오늘 나는 방문객 9다

 

  끊임없이 사건 사고를 쏟아내는 뉴스 채널

  감광지 위에서 미끄러지는 속보들

  스케줄 보드에 가득한 전화번호와

  벽에 갇힌 검은 암호들 사이에서

  허연 이를 드러내며 그가 걸어 나온다

 

  덕분에 광고가 많이 붙었어

  청취자들의 반응이 좋은데

  갈수록 늘어가는 보도국 데스크의 너스레

  그의 얄팍한 입술은 잘 알고 있다

  목소리 하나로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을

 

시집 『생일 꽃바구니』(서정시학, 2006) 중에서

 

 


 

휘민 시인

1974년 충북 청원에서 출생.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 시집으로 『생일 꽃바구니』(서정시학, 2006) 가 있음. 현재〈시힘〉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