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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신선 시인 / 수원지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1.

홍신선 시인 / 수원지방

 

 

  비여

  말없이 번쩍이는 회초리들을 들고

  저 앞들을 만들며 서 있다.

  가래질 논과 보리밭들

  이름 없는 나의 잔등을 비비고 가는 비

  오늘은 맞지 않아도 아픈 잔등으로

  뒹구는

  이 수원지방을 데리고 나는 누워있다.

 

  스쳐서 가는

  비명소리만이 들리지 않고 보인다.

  비속에 사람모양으로 히뜩히뜩 누비며 뛰는

  그 소리들이, 소리의 쓰러짐이 보이고

  너무 많이 가둥그리지 않은

  비탄이 아득하게 흐트러져 있다.

 

  버린 진실도 허튼 말도

  가볍게 썩지 않고

  두엄 논에 흐르는 빗물에 떠다니고 있다.

  허튼 말과 흐르는 도랑물의

  무심한 만남이

  오늘 이 큰 수원지방을 이루고 있다.

 

 시집 『겨울섬』(평민사, 1979) 중에서

 

 


 

 

홍신선 시인 / 어떤 가야산

 

 

  시월 중순

  쉬임없이 등 밟힌 질경이들

  관광객들에게

  예사롭게 부서진 등 내보이며 웃는다.

  장경각藏經閣 판목板木의 경經은 보이지 않고

  삭아서 시간이 되어

  뚜껑 없는 천 칸 공간을

  이곳에

  비워 놓았다.

 

  소낙비처럼 날리는 느릅나무 잎들이 덮고 있다.

  혼자서 살아왔던 일

  출근부 작은 칸을 해진 살 기워 가며

  비집고 다니던 일

  그 일들이

  오르고 내려가며

  새삼 다시 만나서

  손잡고 어깨 안고

  이 절 밖에

  더러는 지는 잎들의 뒷모습으로 앉아 있기도

  더러는

  마음 위에 예리한 발소리 그으며

  덮고 다니기도…….

 

  가슴 안에 가득히 울린다.

  한 획 한 획 새겨놓은 축소된 일생이

  나이 들어 큰 손 속에 덮어둔

  꿈들이

  보이지 않고 읽혀지지 않을 때

  눈 비벼 바라보리라,

  기댈 것 없는 누가

  시력 안 좋은 누가

  무료하게 글자 없는 공간을 더듬어 읽던

  더듬대던 소리가

  더 힘 있게 청명한 날씨로

  그쳐 있는 것을.

 

  어느 길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에 닿게 하고 아직 자기에

  이르지 못한 것들로 하여금 우왕좌왕 몸놀려 숨게 하고

  어느 길은 피해 가서 등성이로만 올라가 섰고

  그 위의 잔광들, 체격 좋은 장정들은

  둘러서서 메고 있다.

  이 공간에

  쉬임없이 침묵으로 와서 부서지고

  뒹구는 죽음을

  죽음 아닌 더운 삶을.

 

  어떤 가야산.

 

시집 『우리이웃사람들』(문학과지성사, 1983) 중에서

 

 


 

홍신선 시인

1944년 경기 화성에서 출생. 동국대 국문과 및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1965년 《시문학》 추천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서벽당집』(1973), 『겨울섬』(1979) , 『삶, 거듭 살아도』(1981), 『우리 이웃 사람들』(1984), 『다시 故鄕에서』(1990), 『다시 黃砂바람 속에서』(1996), 『자화상을 위하여』(2002), 『홍신선 전집』(2004) ,『우연을 점찍다』(2009)가 있고, 논문으로  『한국근대문학이론 연구』, 『우리 문학의 논쟁사』, 『현실과 언어』, 『상상력과 현실』 등이 있음.

서울예대 강사, 안동대, 수원대 교수, 동국문학인회장 역임. 현재 동국대 문창과 교수로 재임. 동국문학상, 경기도문화상(1989), 녹원문학상(1982),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2002)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