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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철 시인 / 언젠가 우리 겹쳐질 수 있을까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0.

김명철 시인 / 언젠가 우리 겹쳐질 수 있을까

 

 

너를 떠나보내고

 

생명이 처음 왔던 자리를 따라가 보면

어쩌면 나는 우연 같은데

가시이거나 파장(波長)이거나 사금파리일 수도 있는데 이 물질적 우연 속에

어떻게 영혼 같은 게 들어갔을까.

내 우연에 섭리를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연히 나비 두 마리를 보는데

하양이 검정을 따르고 검정이 하양을 따르고 날개가 부서진 바람 한 장이 둘 사이를 비스듬히 가르고 지나가고 한 쪽은 마른하늘 같고 한 쪽은 물오른 흙 같고 한 쪽은 못대가리 같고 한 쪽은 벽 같고 바지 같고 치마 같고 한 쪽은 死 같고 한 쪽은 生 같고 사랑과 사랑 같지 않은 사랑 같고 둘 다 같고

 

한 쪽은 너 같고 다른 한 쪽은 나 같은데

다른 한 쪽이 너 같고 그 반대쪽이 나 같기도 한데

우연이나 섭리나 영혼 같은 것들도 슬퍼지고

가시와 파장과 사금파리도 슬퍼지고

 

계간 『시와 사람』 2018년 여름호 발표

 

 


 

 

김명철 시인 / 끈 2

 

 

밑도 끝도 없이 가슴이 아플 때가 있어. 중력의 힘으로 끈이 툭, 끊어지듯이 말이야. 고양이가 어린 쥐를 잡아서 먹지는 않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장난만 칠 때가 있잖아. 이게 뭔가요. 코만 밖으로 내놓을 수 있는 늪인가요. 차라리 밑이 없으면 좋겠어요. 죽을 때까지 가슴에 멍이 드는 거지, 뭐랄까, 죽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병 같고,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병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무게 때문도 아닌 것 같아. 먼지도 무중력에서는 가라앉을 수 없어 늘 상하좌우 모두 끊어져 있잖아. 아이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들어봐. 자꾸 떠나려 하잖아. 어떤 박테리아는 섭씨 122도 바다 밑 열수구나 지하 2.8km에서 천 년을 산대. 우라늄을 먹고 산다지만 그것도 살긴 사는 거야. 살아있다고는 하지만 왜 사는지는 몰라요. 관심 없어요. 끝이 있고 없고도 상관없어요. 어쩌면 가슴은 슬픔으로 만들어졌을 거야. 죽어서도 아플 거야. 무엇이 우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아플 만큼 아프고 나면 아프지 않다는 말도 거짓말이야. 그러니까, 몸만 아프지 마.

 

계간 『시에』 2019년 봄호 발표

 

 


 

 

김명철 시인 / 모색(摸索)

 

 

선의(善意)의 포클레인이 얼어붙은 땅을 파헤쳐 길을 넓히고 있습니다.

수만 수억의 생명들이 느닷없이 동사(凍死)할 것입니다.

 

햇살 쪽으로 다가서려는 한겨울의 이파리처럼

장난처럼 포클레인처럼

나와 당신이 서로에게 입김을 불어넣어줄 때에도

당신이나 나는 잎을 틔우고 가지가 부러지고 꽃을 피우고 뿌리가 흔들릴 것입니다.

열매를 맺고 또 열매가 썩어갈 것입니다.

 

공포와 전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시간의 마지막 날에 솟아오를 아마겟돈 정상에서

어떻게 피를 흘릴지에 대한 것도

어떤 색깔의 피를 흘려 하늘에 오를지 땅으로 꺼질지에 대한 것도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두루뭉수리 구름만큼이나 지금은 갈피가 없는 일입니다.

 

시간은 한겨울의 새떼처럼

무리의 맨 앞에서 하늘을 가르던 부리가 다른 부리로 대체된다 해도

맨 뒤를 따르던 날개가 땅에 떨어진다 해도

굳건한 편대의 대오를 흩트리지 않을 것입니다.

 

질서정연에서 오는 카오스

 

카오스를 뚫고 솟아나오는 당신의 얼굴

 

당신의 얼굴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맑고 투명한 눈물

 

발 디딜 곳을 찾고 있습니다만

눈이 가는 곳마다 비행구름처럼 실체가 사라져

화분을 햇살 쪽으로 옮겨놓는 심정으로 나와 당신을 바라볼 뿐입니다.

 

계간 『문학청춘』 2018년 겨울호 발표

 

 


 

 

김명철 시인 / 우리는 바람의 얼굴을 꽃이라 하고 싶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더니 꽃이 피었다.

바람의 얼굴이 꽃이었을 것이다.

(이때 마당개의 장난이 꽃의 뿌리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꽃이 피더니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날리는 얼굴들이 쌓여갔다.

(이때 마당개의 장난이 얼굴의 뿌리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봄이었다 장식처럼

해와 달이 같이 떠 있는 때가 많았다.

달을 돌아나간 구름이 해를 가려 어두워지면

바람이 불었고

꽃이 떨어졌다.

때때로 뒤늦게 비가 내리기도 했다.

 

바람에 날려 쌓이는 꽃무덤처럼

맨 밑에 떨어진 얼굴부터 썩어갔다 썩은 얼굴 위로

기어이

生氣가 돋아나고 있었다.

(이때 마당개의 장난이 生氣 위에 앞발을 올리고 있었다)

 

계간 『문학의 오늘』 2018년 여름호 발표

 

 


 

김명철 시인

2006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서울대학교 독문과, 고려대학교 국문과 대학원(문학박사) 졸업. 시집으로 『짧게, 카운터펀치』(창비)와 『바람의 기원』(실천문학)이 있음.  2007년, 2014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2012년 '천태산은행나무문학상' 대상. 2018년 경기문화재단 우수작가 선정. 현재 <경기신문> '아침시산책' 필진,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