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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신애 시인 / 오래된 서랍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0.

강신애 시인 / 오래된 서랍

 

 

  나는 맨 아래 서랍을 열어보지 않는다

  더 이상 보탤 추억도 사랑도 없이

  내 생의 중세가 조용히 청동녹 슬어가는

 

  긴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서랍을 연다

  노끈으로 묶어둔 편지뭉치, 유원지에서 공기총 쏘아 맞춘

  신랑 각시 인형, 건넨 이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코 깨진 돌거북, 몇 권의 쓰다 만 일기장들……

 

  絃처럼 팽팽히 드리운 추억이

  느닷없는 햇살에 놀라 튕겨나온다

 

  실로 이런 사태를 나는 두려워한다

 

  누렇게 바랜 편지봉투 이름 석 자가

  그 위에 나방 분가루같이 살포시 얹힌 먼지가

  먹이 앞에 난폭해지는 숫사자처럼

  사정없이 살을 잡아채고, 순식간에 마음을

  텅 비게 하는 때가 있다

 

  겁 많은 짐승처럼 감각을 추스르며

  나는 가만히 서랍을 닫는다

 

  통증을 누르고 앉은 나머지 서랍처럼

  내 삶 수시로 열어보고 어지럽혀왔지만

  낡은 오동나무 책상 맨 아래 잘 정돈해둔 추억

  포도주처럼 익어가길 얼마나 바라왔던가

 

  닫힌 서랍을 나는 오래오래 바라본다

  어떤 숨결이 배어나올 때까지

 

 


 

 

강신애 시인 / 숲속의 보물찾기

 

 

  바이올린 하나 들고 숲속 보물찾기에 나섰네

  숲의 메트로놈, 새의 목젖은 갈참나무 잎사귀를 똑똑 끊어

  한낮의 햇살 속으로 던지고 있었네

  내 점심은 버섯, 새알, 흰꽃은 후식이라네

  숲은 번식을 준비하는 야생동물의 활기로 가득 차고

  나는 나무 밑동을 뒤지거나 딱따구리가 파놓은 구멍에

  손을 넣어보며 덤불 헤쳐나갔네

  이따금 곰을 만나거나 낙엽의 그물에 걸려

  꼼짝할 수 없을 때면 바이올린을 켰네

  신기하게도, 내 몸은 깃털처럼 가볍게 들려

  숲의 다른 곳으로 옮겨졌네

  햇살 꺾여 세공 안된 다이아몬드처럼 거친 빛을 발하던 숲은

  짝을 찾은 짐승들의 벅찬 숨결로 부풀어올랐네

  그는 늘 감추고 달아나고, 나는 무작정 찾아나서야 하는

  이 불공평한 게임의 끝은 어딘지 따위의 의문은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었네

  혹, 이 숲에 감춘 보물 따윈 없는 게 아닐까?

  바이올린 현에 내 슬픔과 격정을 조율하다 보면

  몸이 가문비나무 울림통처럼 가벼워져

  우거진 숲에 가리운 늪과, 무서운 짐승을 피해갈 수 있음을 가르치려

  나를 이 숲으로 이끈 게 아닐까?

  한 숲이 끝나고 또다른 숲이 시작되는 곳에서

  나는 그가 숨긴 것이 무엇인지 알았네

 

 


 

 

강신애 시인 / 두 겹의 방

 

 

  나는 그 숲의 불가사의한 어둠을 사랑하였습니다

  밤이면 습관적으로 음란해져

  숲으로 들어가면, 숲은 내게로 기울어

  귓속 차고 슬픈 전설이 흘러나와 발가락을 적십니다

  나는 노루처럼 순한 눈망울로

  숲이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에 빠져듭니다

  며칠 가지 않으면 숲은

  일없이 가랑잎이나 발등에 쌓아놓고

  종일토록 심심해합니다

  내가 길에 뜻없이 굴러다니던

  옹이투성이 통나무들을 주워다

  이 숲에 방을 들인 건 언제부터일까요

  마지막 망치질로 문패를 달고

  이름 석 자 적어놓습니다

  길 위에서 방을 구할 때

  방은 달아나고 찢겨,

  내 잠은 줄줄 샜습니다

  따뜻한 뿌리 베고 나는 나뭇결 고운 잠을 잡니다

  가수가 몇 옥타브 고음을 위해

  영혼을 수천 미터 상공 어느 한 지점에 띄우듯

  나는 이 방에서 어떤 출생을 꿈꿉니다

  신이 땅을 만드시고 숲으로 기름지게 하신 것처럼

  숲은 내 방으로 그 특이한 어둠을 한 겹 벗을 것입니다

  까막까치 울음소리로 장작 타들어가고

  아침밥 지을 때,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가

  이 숲을 밥냄새 가득한 인간의 방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나는 두 겹의 방에서 삽니다

 

 


 

 

강신애 시인 / 사막을 파내려가 거기

 

 

종일 흰 무덤 목련꽃이 실수로 印畵한

저쪽

바라보다 퇴근한다

 

자곡동 성남 분당 몇갈래로 흩어지던 마음 모아

탑성마을에 내리면

깊은 숨 몰아쉬는 숲 위로

잠언처럼, 떠오르는, 방

 

후들거리는 서른

눈 깊은 숲과 살림 차려

이사온 후로 내 어깨 양쪽은 늘 숲에 젖어 있다

 

호주머니 속,

치사량의 신기루는 어디론가 새버리고

백열등 보얀 내 방으로

두근두근 돌아간다

 

사막을 파내려가 거기

꽃뱀으로 또아리 튼 숲과 나는

목련 같은 아이를 가지리라

 

모래바람 속, 줄줄이 불려나온 진눈깨비 목련

사막은 더 이상 사막이 아니다

 

 


 

 

강신애 시인 / 바다의 완력은 당해낼 수 없다

 

 

  여관 강변장은 성당 같다

  입구의 청동 인어상을 나는 마리아라고 부른다

  묵주 대신 커다란 소라를 쥔 한 손은 하늘로 뻗치고

  한 손은 자신의 음부를 가린

  半神半魚의 마리아

  헤드라이트 불빛이 터진다, 찔린 듯 경련하는 조각상

  비늘이 꽃처럼 떨어진다

 

  녹색의 개가 비늘을 뒤적거리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취객 하나,

  난산의 안개가 연인의 긴 그림자를 끌고 강변장으로 스며든다

 

  나직하고 끊길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낸 이 누굴까

  이 밤, 조각상 앞으로

 

  내가 해 떨어진 아스팔트 길 위에서 중생대의 숲을 그리워할 때

  상처를 따라가듯 아무도 모르게 성호를 그어보일 때

  강변장 입구를 뭇시선으로부터 차단한 나무들이

  이파리를 동그랗게 모으고 속삭인다

 

  널 환영해, 여기부터 古典이야

 

  늦은 영업집에서 전자오르간 소리는 적막을 포장하고

  네온이 조각상의 봉긋한 가슴에 순교의 푸른 물을 들일 때

  인어가 오랜 침묵에서 깨어나

  가만히 소라 하나를 건넨다

 

  나는 굶주림과 파도와 싸우다 지친 선원처럼

  허겁지겁 소라에 귀를 기울인다

  검고 요요한 음향의 회오리……

  바다의 완력은 당해낼 수 없다

 

월간 《문학사상》 1996년 신인상 등단시

 

 


 

강신애 시인

1961년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 1996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시  〈오래된 서랍〉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는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창작과 비평사, 2002)과 『불타는 기린』(천년의시작, 2009), 『당신을 꺼내도 되겠습니까』(문학의전당, 2014)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