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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성렬 시인 / 공터를 지나며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6.

이성렬 시인 / 공터를 지나며

 

 

  퇴근길의 전철역과 집 사이

  중간쯤에 놓인 그 빈터는

  아무런 개인사의 흔적도 없이

  그저 잡초로 덮여 있다.

  삼면이 집들로 싸여 있는 대로변의

  그 땅은 꽤 값이 나갈 법도 한데

  나는 그곳을 지나며 혹시 그곳에

  무덤을 들이면 어떨까, 물론

  근린의 연립주택 주민들이 결사항전을

  벌이겠지만, 그런 묘지가 아니라

 

  나의 말들, 태어났지만 그냥 묻힌

  시라든가, 누구에게도 내밀지 못한

  부끄러운 고백과 같은 가여운

  사산아들을 한 귀퉁이에 묻는다면

  시청직원이 허가할지도 몰라

  그러면 그 목질성분이 그늘에 심은

  닥나무의 양분이 되어 오랜 후에

  어느 시골집의 창호지로 생겨난다면

  그래서 겨울 칼바람에 떨리는 소리를 낸다면

  외로운 박새가 귀 기울일 수도 있고

 

  이별을 예감했는지 내가 짐을 싸며

  간식을 물려주었을 때 그토록

  좋아하는 먹이를 입에 문 채로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멍멍이

  루이의 영혼이 그 집을 지나다가 나의

  손길을 그리워하며 머물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에 잠겨 공터에 머물다가

  나는 아파트 계단을 쉬지 않고 올라

  갑자기 돋은 생의 식욕에 얼른 식사를 마치고

  어젯밤에 노트로 옮긴 옛 소설가의

  참으로 가슴 아픈 문장*의

  무릎에 굳은 각질을 닦아주는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 「그 후」: <어차피 하나의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운명에 봉착할 것이 틀림없다. 그때 그는 조용히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차림을 하고 거지처럼 뭔가를 찾으면서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서성일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2018년 6월호 발표

 

 


 

이성렬 시인

1955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및 KAIST 졸업.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 수여받음. 2002년 《서정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모아드림, 2003)와 『비밀요원』(서정시학, 2007) 가 있음. 웹진 『시인광장』 副주간 역임. 현재 경희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