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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임 시인 / 이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6.

김정임 시인 / 이슬

 

 

이곳은 중환자실

 

돌고래가 되어 살고 있어

 

낯선 육지로 떠밀려온 것 같아

 

수액이 흐르는 몸에선 죽음의 냄새가 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지칠 때까지 날마다 사람이 되는 꿈을 꿔

 

하얀 시트를 깔았는데 사방이 왜 이리 어둡지

 

이 방을 지나면 아홉 개의 문이 열릴까

 

숨을 쉴 때마다 산소호흡기 안에서 솟구치는 물방울

 

나는 한때 이슬에 몸을 기댄 풀잎일까

 

누가 나의 음악을 연주하나

 

세이렌, 나는 마지막까지 춤을 춰

 

한 방울 마지막 이슬과 함께

 

반년간 『포에트리 슬램』 2019년 상반기호 발표

 

 


 

 

김정임 시인 / 모감주나무 이야기

 

 

당신 가슴의 잎들이 속잎을 벗겨내는 밤이다

 

쐐기풀을 뜯어 옷을 만들어야하는 사람같이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더는 가지 못하고

 

언제부턴가 몸 안에서 새가 울었다

 

가슴에 꽉 찬 물소리에서 붉은 빛이 났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별처럼 지난 이야기가 어떤 고백을 끝낸다

 

처음부터 없었던 생이라고 백지에 쓰면 사물들은 가벼워지는데 군데군데 구멍 난 당신의 못자국을 통해 일요일의 해가 뜬다

 

곧 떠날 나라의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새

 

떨어뜨려야 할 것들이 많아 서 있는 바람들

모든 일은 한결같이 일어났지만

 

당신의 얼굴을 본적이 없었다

 

금요일 저녁까지 서 있어야 할까

 

찬바람 사이 모감주나무가 흔들리고, 어딘가에서 당신은 오고 있다

나는 캄캄해지고 환해지고

 

계간 『문학과 창작』 2018년 겨울호 발표

 

 


 

 

김정임 시인 / 감자 깎는 저녁

 

 

도라지꽃 바다에서 가슴이 내려앉던 그날이 있었다

 

어디선가 수도원 종소리가 들렸던가

그날은 달의 서식지가 되었을까

 

수백 년이 흐른 것 같다

 

나는 여전히 감자를 깍으며

서쪽 창으로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것은 아니었는데

실족하듯 떨어지는 감자의 눈

 

그날을 향해 눈을 뜨면 그날의 파도가 밀려온다

너였을까, 나였을까

 

일기를 쓰다 불려나온 저녁처럼

감자를 양 손에 들고

네가 돌아올 거라고 믿으면서

 

높은 곳을 끝없이 걸으면

중세의 창가

수백 개 종이 한꺼번에 울리던 날들

 

어디에서부터 멀어진 걸까

문득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지만

 

이젠 중세를 향해 내려가지 않을래

날아다니다 어두워지면 너를 지나갈래

 

파랗게 물드는 감자의 눈

 

계간 『시와 문화』 2018년 겨울호 발표

 

 


 

김정임 시인

2002년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2008년 《강원일보》 시부문 당선. 시집으로 『달빛 문장을 읽다』(문학아카데미, 2008)와  『붉은사슴동굴』(천년의시작, 2013)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