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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임 시인 / 이슬
이곳은 중환자실
돌고래가 되어 살고 있어
낯선 육지로 떠밀려온 것 같아
수액이 흐르는 몸에선 죽음의 냄새가 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지칠 때까지 날마다 사람이 되는 꿈을 꿔
하얀 시트를 깔았는데 사방이 왜 이리 어둡지
이 방을 지나면 아홉 개의 문이 열릴까
숨을 쉴 때마다 산소호흡기 안에서 솟구치는 물방울
나는 한때 이슬에 몸을 기댄 풀잎일까
누가 나의 음악을 연주하나
세이렌, 나는 마지막까지 춤을 춰
한 방울 마지막 이슬과 함께
반년간 『포에트리 슬램』 2019년 상반기호 발표
김정임 시인 / 모감주나무 이야기
당신 가슴의 잎들이 속잎을 벗겨내는 밤이다
쐐기풀을 뜯어 옷을 만들어야하는 사람같이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더는 가지 못하고
언제부턴가 몸 안에서 새가 울었다
가슴에 꽉 찬 물소리에서 붉은 빛이 났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별처럼 지난 이야기가 어떤 고백을 끝낸다
처음부터 없었던 생이라고 백지에 쓰면 사물들은 가벼워지는데 군데군데 구멍 난 당신의 못자국을 통해 일요일의 해가 뜬다
곧 떠날 나라의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새
떨어뜨려야 할 것들이 많아 서 있는 바람들 모든 일은 한결같이 일어났지만
당신의 얼굴을 본적이 없었다
금요일 저녁까지 서 있어야 할까
찬바람 사이 모감주나무가 흔들리고, 어딘가에서 당신은 오고 있다 나는 캄캄해지고 환해지고
계간 『문학과 창작』 2018년 겨울호 발표
김정임 시인 / 감자 깎는 저녁
도라지꽃 바다에서 가슴이 내려앉던 그날이 있었다
어디선가 수도원 종소리가 들렸던가 그날은 달의 서식지가 되었을까
수백 년이 흐른 것 같다
나는 여전히 감자를 깍으며 서쪽 창으로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것은 아니었는데 실족하듯 떨어지는 감자의 눈
그날을 향해 눈을 뜨면 그날의 파도가 밀려온다 너였을까, 나였을까
일기를 쓰다 불려나온 저녁처럼 감자를 양 손에 들고 네가 돌아올 거라고 믿으면서
높은 곳을 끝없이 걸으면 중세의 창가 수백 개 종이 한꺼번에 울리던 날들
어디에서부터 멀어진 걸까 문득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지만
이젠 중세를 향해 내려가지 않을래 날아다니다 어두워지면 너를 지나갈래
파랗게 물드는 감자의 눈
계간 『시와 문화』 2018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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