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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지관순 시인 / 마콘도에서 100년 동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6.

지관순 시인 / 마콘도에서 100년 동안

 

 

몸통보다

큰 깃털로 시를 쓰는 새가 있다

커다란 새장에 대해 그림을 그리고

그런 다음 늦잠을 자고

  시간을

 

​        새장 안의 시간과 새장 밖의 시간으로 나눈다

 

새는 새장을 나갈 때마다 빨리 늙어버리고

새장 밖의 애인은 망고를 좋아하지

 

망고나무는 아직 생겨나기 전의

 망고의 미래

새는 망고 생략하는 법을 배우다가

 나뭇가지에 샛노란 상현달 걸어둔 것도 잊은 지 오래

실패한 망고가 자꾸 장미를 괴롭힌다

망각해! 제발 잊으라고,

 망각하란 말이야!

 

새장 밖으로 길고 긴 시간이 끌려 나간다

 

나무야 나무야 망하지 않는 망,망,망고나무야

꿈에서는 그토록 쉽고 예쁘고 아담하게

 열매를 맺더니

 

새장은 날아가도, 날아가도 닿는 곳이 없다

장미꽃 잠옷만 입은 애인은 외롭다

애인의 휘파람 소리는 무척

바쁘다

 

         새여,

         망고가 망고답도록 놔두어다오

 

오후 3시의 근사한 울음소리에 꼬리를 흔드는 새는

  점점 눈이 멀어간다

망고나무 아래 애인은 깃털로 쓴 미래를 저렇게나

맛있게 씹어 먹으며

  새장 밖의 시간을 새장 안으로 옮겨 적는다

 

그 사이 100년이 후드득 지나간다

 

계간 『시현실』 2019년 봄호 발표

 

 


 

 

지관순 시인 / 레몬의 창가에서

 

 

 

나무를 심지 않은 건 나의 잘못 레몬 가지를 밝히려면

우정이 필요하지만

레몬에 대해서는

누구나 관대해질 수 있다

 

아만다는 잘 지내고 있겠지

땅딸보 아저씨의 강아지는 아직도 꽃을 물어뜯을까

 

레몬 향을 우려낸 바람과

계속 옷을 갈아입는 토끼구름

 

회중시계의 태엽은 감아도감아도 12시를 넘지 않을 거야

정오는 레몬처럼 고요해

 

레몬을 반으로 자르면 세계에 불이 들어온다 과즙이 닿는 곳마다

헤엄치며 빠져나가는

레몬의 저녁

 

고백하는 것만으로 레몬은 어둑해지고

말하자면 깊은 밤 고양이 춤과 음표 위를 흘러가는 손가락의 온도

 

무혐의의 지느러미가 저녁을 흔든다

 

레몬을 모두 꺼버린 나무 아래

너와 내가

레몬이 아닐 확률은 얼마나 될까

 

잘 부탁해 레몬이 문을 닫아버리는 계절과

풀밭 서재에서 일어난 소소하고 짓궂은 일들을

 

계간 『문파』 2018년 겨울호 발표

 

 


 

지관순 시인

제10회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 2015년 《시산맥》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