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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빈 시인 / 시집 혹은 시집 봉투
누군가 고단한 길 지우며 살구꽃 피는 소리 휘날릴 쯤 시집 한 권 받았습니다. 담겨온 봉투는 아름답고 여느 봉투보다 작기도 했습니다. 4각 모서리의 각오가 단단해 보였습니다. 딱 그만큼 크기의 시집 외엔 세상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양장본 각오입니다. 몇 페이지 몇 째줄 오타가 고쳐주길 기다리는 것 따위엔 관심 없습니다.
살구나무집 살구꽃으로 곱게 자라며 살구꽃잎 떨어지고 살구 노랗게 익을 땐 신맛에 미쳐 치맛자락에 살구를 주워 담던 부엉재숙모, 어린나이에 시집와서 여전히 노랑신봉투에 넣어져 자라고 있습니다.
한 번도 시 대신 시집말을 친정에 부쳐본 적 없이 살구 대신 하얗게 익은 소금꽃 짠가풍 익히던 부엉재숙모, 外間에서 부엉이소리 나면 행여나 뒷소문 날까 방문 꼭꼭 닫아걸었지요. 밤마다 달빛 불러 청상심 물리친 흔적, 그방문 열어보면 청상 푸른시집 한 권 여전히 시렁에 얹혀있습니다.
봉투란 그런 것 시집이란 것도 그런 것이겠지요. 참 짝지고도 외로운 말 안성맞춤이란 말, 택호가 붙으면 옮겨갈 수도 없다는 말, 가혹하고 쓸쓸한 푸른시집 한 권이 살았습니다.
웹진 『시인광장』 2018년 6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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