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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규리 시인 / 우리는 또 무엇으로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7.

이규리 시인 / 우리는 또 무엇으로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을 햇빛, 바람, 구름인데

  몇 시간 째

  구석에 앉아 그냥 바라보고만 있다.

 

  한 사람이 아파서 다 아프고

  그 한 사람은 아픈 것도 모르고

 

  햇빛 든 자리 온기가 식어가고 있을 때

 

  라디오를 진행하는 사람은 어느 젊은 가수의 죽음을 말하며

  내내 울먹였다.

 

  우리는 또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대신 아파줄 수가 없는 이것도 사랑이라고,

 

  차라리 치득치득 쌀이라도 문질러야 되지 않는가

 

  제 이름 불린 듯 나뭇잎들은 우르르 구석으로 몰려가고

  다시 구석을 비워주고 있다.

 

  우리가 믿었던 것이 그저 버티는 것 외에

  아무 의미가 되지 못한다는 걸 알았을 때

 

  도리어 아픈 사람이 성한 사람을 위로하고 있었다.

 

  젊은 가수가 죽었다는데

 

  국화꽃이파리는 돌돌 말리어 제 안을 다시 파고든다.

 

계간 『시산맥』 2015년 봄호 발표

 

 


 

이규리 시인

1955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세계사, 2004)과 『뒷모습』(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등이 있음. 2015년 제6회 질마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