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 /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시집 『52인 시집』(신구문화사, 1967) 중에서
작품해설
신동엽(申東曄) [1930~1969] 시인. 그는 현대시 100년史에 있어서 우리나라가 처해있던 가장 불행했던 시대를 살다간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태어났다. 신동엽의 유년 시기는 일제의 군국주의가 수탈정책을 극도로 강화하여 헐벗고 굶주림이 지배하는 절대적 빈곤의 시대였다.
부여초등학교 시절에 신동엽은 과묵하고 내향적 성격이었다. 곧잘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고, 6년간 내리 우등상을 탈 정도로 두뇌가 명석했다. 6학년 때 '내지성지참배단'의 그 학교 대표로 뽑혀 보름간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다.
1943년 부여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국가에서 숙식과 학비를 지원해 주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절대적 빈곤의 시대에 가난한 수재들이 열망하고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사범학교였다. 그는 학우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문학,종교,사상서에 파묻혀 살았다. 일제의 무리한 근로봉사와 굶주림으로 건강을 잃어가던 이 시기가 비로소 민족의식에 눈뜬 시기이다.
재학 중에 해방을 맞았는데 그는 1948년 남한 총선을 반대한 동맹 휴학 가담으로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다. 또, 그는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 학생들에게도 끌려가 심한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좌·우익에게는 '중립'으로 여겨지는 그의 소박한 '민족주의'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이데올로기보다 민중 자체가 더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범적인 식민지 학생이나 혼자만의 문학세계에 빠져있던 모습과는 다른 내면의 변화를 나타낸다.
1948년 동맹 휴학으로 학교가 잠시 쉬자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던 신동엽은 1949년 부여 주변에 있는 국민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시인은 3일 만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그는 다시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그는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진정한 민족주의가 좌절된 정치적 현실에 대한 좌절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恨)의 서정으로 표현한 <나의 나>를 쓴 것이 이 때이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가 그해 9월 말까지 부여 민족청년회 선전부장으로 일하다 국민방위군에 징집됐다.
한국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과 대한민국 국군(국민방위군)에 각각 징집되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체험한 후 첫 작품 〈나의나〉를 완성했다. 특히 국민방위군 시절 부패한 군간부와 공무원들이 군수품을 임의로 처분하는 바람에 많은 고통을 겪게 되는데, 그것 때문에 강한 사회 비판과 현실 참여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은 살아있는 가재 때문에 간디스토마에 걸려 일생을 두고 고통을 겪었다.
또한 이 시절에 백제 사적과 갑오농민전쟁 전적지 답사하였는데 이는 훗날 그가 1960년대 대표적 참여 시인이 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반봉건·반외세의 갑오농민전쟁에서 그는 '적'을 인식하게 되는 확실한 역사의식을 가진다.
1953년 대학을 졸업 후에는 서울에서 친구의 헌책방 일을 하며 자취를 했다. 여기서 소설가 현재훈과 아내 인병선을 만난다. 열렬한 연애 끝에 1956년 결혼,부여에서 신혼집을 차렸으나 가난은 여전했다. 아내의 양장점 개업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자 구상회 등 문학지망생들과 어울려 시인이 될 꿈을 키운다.
그 후 보령농고에 취직했다, 그러나 디스토마가 발병해 각혈과 고열에 시달리게 되면서 가족과 헤어져 본가에서 요양했다. 이때 시쓰기에 몰두해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를 썼고 1959년 조선일보에 20여행이 삭제되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됏다. 이 시로 인해 시인 박봉우와 만나 참여시인으로서 둘도 없는 문우가 되었다.
4.19의 체험 이후, 그는 1960년대 대표적인 참여시인으로 활동 했다. <학생혁명시집>엮어 4.19의 정신을 자유와 정의로 읽고, 승리와 그 감격을 노래했다. 그러나 미완의 혁명은 쓰라린 좌절도 함께 가져다 주었다.
명성여고 교사로 재직하면서부터는 그가 사망할 때까지 8년동안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1961년 2월, 혁명의 좌절로 인한 정신주의에 몰두한 시기로 정신사적 시론 <時人精神論>을 발표하며 무정부주의·동양적 정신주의·민족주의를 나타낸 시관을 보여줬다.
그의 시 <껍데기는 가라>는 현실적 과제를 정면으로 문제 삼는 1960년대 참여문학의 대표시로, 이 후 독재에 항거했던 민중 민족 문학의 지향성에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시는 1960년대라는 구체적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껍데기'와 '알맹이'라는 이분법적인 대비구도를 통해 순수에 대한 옹호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우리 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들인 4·19와 동학 농민운동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사건들이 민주·자유를 지향한 운동이었으며, 시인의 시세계 또한 이러한 것을 노래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4월 혁명이 보여주었던 순수한 민주화의 열망은 점점 퇴색되어 가고, 동학혁명의 민중적 열망도 소멸되어가고 있는데다가, 현실은 그들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군사 정권에 의해 이 강토가 짓밟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에 안타까움을 금하지 않는다.
'껍데기는 가라'라는 말의 6번의 단순한 반복이 지루하지 않고 감동을 자아내는 것은, 현실을 그만큼 많이 차지하고 있는 '껍데기'라는 존재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인 듯하다. 시인이 원하는 것은 한마디로 '껍데기'는 이 땅에서 사라지라는 것이다. 그러면 '껍데기'가 무엇인가?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 행에 나오는 '쇠붙이'뿐이다. 다만 '껍데기'와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 바로 '4월혁명의 순수성, 동학혁명의 아우성, 아사달 아사녀의 맞절, 향그러운 흙가슴' 등인데, 이것들을 통해 껍데기의 의미를 유추해 보면 "가짜, 거짓, 위선, 불의, 참된 민족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 민족과 국토의 통일을 방해하는 것, 민족을 파멸로 이끄는 외세와 전쟁 따위일 것이다.
이 시는 '알맹이'로 표현되는 여러 시어들과 '껍데기'로 표현되는 시어를 대비시킴으로써 시인의 염원하는 세계를 강조하고 있으며, 추구하는 염원을 더욱 순수하게 승화시키고 있다.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정주 / 내리는 눈 밭에서는 (0) | 2019.05.18 |
---|---|
이육사 시인 / 편복(蝙蝠) (0) | 2019.05.17 |
김기림 시인 / 쥬피타 追放 외 7편 (0) | 2019.05.16 |
윤동주 시인 / 서시(序詩) 외 5편 (0) | 2019.05.15 |
백석 시인 / 정주성(定州城) (0) | 2019.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