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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윤동주 시인 / 서시(序詩)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5.

윤동주 시인 /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중에서

 

 


 

 

윤동주 시인 / 또 다른 고향(故鄕)

 

 

  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宇宙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에 가자

 

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중에서

 

 


 

 

윤동주 시인 /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중에서

 

 


 

 

윤동주 시인 / 사랑스런 追憶

 

 

  봄이오든 아츰, 서울 어느 쪼그만 停車場에서

  希望과 사랑처럼 汽車를 기다려,

 

  나는 푸라트·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터러트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속을 속, 속, 햇빛에 빛워, 날었다.

  

  汽車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 다 주어,

 

  봄은 다가고… 東京郊外 어느 조용한 下宿房에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希望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汽車는 몇번이나 無意味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기다려 停車場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어있거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중에서

 

 


 

 

윤동주 시인 / 눈 오는 地圖

 

 

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깔린 地圖 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壁과 天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歷史처럼 훌훌히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 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내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서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조그만 발자국을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1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중에서

 

 


 

 

윤동주 시인 / 별 헤는 밤

 

 

계절(季節)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來日)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靑春)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追憶)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小學校)때 책상(冊床)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異國) 소녀(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쓰․짬' `라이넬․마리아․릴케' 이런 시인(詩人)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중에서

 

 


 

윤동주 [尹東柱, 1917.12.30 ~ 1945.2.16] 시인

北間島(븍간도)의 명동촌서 출생. 아명은 해환(海換). 1936년 광명학원을 거쳐 1941년 연희전문 문과 졸업. 일본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서 수학. 1943년 귀향 직전 항일운동 혐의로 일경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에서 옥사.  작품으로 『서시』,『자화상』,『별 헤는 밤』,『또다른 고향』, 『쉽게 쓰여진 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등이 있고,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