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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옥 시인 / 예약된 시간들 ㅡ‘졸리면 제발 쉬었다 가세요’
졸음의 그림자가 기나긴 어둠으로 눈꺼풀을 쓸어내렸습니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먼 먼 오늘
‘맨 인 블랙박스’ ⃰가 재생해주는 충돌하고 날아가고 뒤집어지고 우그러지는 또 충돌하고 날아가고 뒤집히고 처박히는
비상등 점멸하는 버스 앞에 오토바이가 쓰러져 있습니다. 흰 우유와 초코 우유가 엉기고 있습니다. 흰색 진갈색 뭉클뭉클 카페라테, 아니아니 검은 분홍 어디선가 낯선 빨강이 왈칵 몰려옵니다 단말마 직전 몸부림의 빛깔인가요. 언젠가는 죽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내자던 나를 갉아먹던 핏빛 머금은 그 말씀 미래는 죽음을 모릅니다. 고추기름 냄새가 지하에서 스며옵니다. 창백한 손들이 사자死者의 얼굴로 길게 포개졌다 찢어지는 그림자들 육개장의 붉음으로도 영안실 특 102호의 흑과 백을 컬러로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내게는 예약된 시간이 남아 있어요. 예약된 화면이 반짝반짝 장례식장 로비의 잠을 깨웁니다. 에베레스트산 등성이가 금 간 거울 같아요 칼끝 같아요. 눈 폭풍이 진검으로 쳐낸 눈보라 속 목숨 하나 하얀 깃털 되어 번쩍이며 날아갑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빛 반사거울 산등성이에 관통당하는 미래입니다. 내일도 모레도 아닌 끝없는 재방송 속 당신의 미래는 무효입니다. 영하 196도 액화 질소탱크 속에서 부활을 기다리는 150구의 시신을 환자라고 부른다지요. 차가움이나 따뜻함의 개념조차 없는 세계 속으로 들어간 얼음덩어리들 반복 수정 편집으로 태어나는 시간도 있습니다.
절대온도 영하 273℃를 향해 나도 서서히 얼어붙어 갑니다.
맨 인 블랙박스/ 블랙박스에 찍힌 교통사고 영상을 재생해서 보여주는 TV 전문채널 프로그램 이름
웹진 『시인광장』 2018년 5월호 발표
김은옥 시인 / 흐르다
밤새 보채던 아랫집 아기 울음소리가 봄비에 쓸려간다.
민낯으로 들이미는 새벽 옆에서 시계 초침이 내게 묻는다. 상상력이 왜 그리도 없느냐고 형광등 빛이 라일락 꽃 색으로 흐려질 때 진한 꽃향기가 불 켜오는 생각이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선다. 늘 익명으로만 살아온 여자가 거미줄 걷어내며 홀가분하게 걸어 나온다. 드디어 아침은 시작되고 흐른다. 산의 내장에서 내장으로 살피듬에서 살피듬으로 발등을 지나 발등으로 손금을 흐르는 맑은 물소리 따라 나도 흐른다. 비 그친 뒤 아래층 아기 울음이 다시 힘차게 벽을 넘는다.
계간 『불교문예』 2017년 가을호 발표
김은옥 시인 / 밤은 캄캄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어두운 곳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대 눈빛을 더욱 뚜렷이 읽을 수 있다 길고양이 되어 허공을 밟으며 그대의 눈빛을 지난다 나는 불빛 아래 떠오르는 먼지 내 눈은 넘치거나 말라버린 샘 내 눈으로 나를 비출 수가 없다 단풍잎을 대신해서 전기톱이 울어주는 계절 그림자가 밤길을 간다 제 생각에 빠져 골똘한 산과 빌딩의 등성이를 타고 흐르는 밤은 크고 깊은 눈을 빛내며 속속들이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고 코끼리 귀 같은 큰 귀 펄럭여 긴 코로 별빛과 달빛을 뿜어준다 푸른 새살 깊숙이 전기톱의 흉터를 품고 울혈증을 앓는 나무의 비밀들까지 그 눈썹 작은 떨림까지 세월의 파들거림까지
계간 『다층』 2017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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