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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숙 시인 / 오징어
여자는 오전을 손톱정리에 매달렸다. 아니 자세히 보면, 귀퉁이 뜯겨진 시커먼 궤짝위에 열 손가락 올려 해동한 후 긴 손톱으로 흐르는 먹물 찍어 치장 하고 있다. 물건 정리 하는 옆집 야채가게 총각 구성진 트롯트가 이따금 박자를 놓친다.
이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오메, 징한 놈! 번쩍이는 불빛에 홀려 몇 번 드나들었건만 인정사정없이 옆구리에 시퍼런 꼬챙이를 꽂던 생각나 심장이 가늘게 뛴다. 하긴 콸콸 쏟아지는 검은 피를 찍어 주절주절 써댄 각서만도 벌써 여러 장이니 행인들 손가락질도 이젠 예사다.
겨울해가 가게 안에서 성큼성큼 빗겨나가고 비린 물이 바닥에 흥건해져 붐비는 시간 언 동태궤짝 메다꽂아 떼어줄 일이 시급하긴 하다만 어차피 혼인묵계* 지키는 년놈 몇이나 될까?
빨판 힘껏, 지나다니는 치마폭 감아쥐고 호객하다가 땅거미에 하나 둘 집어등 불 밝히면 미끄러지며 시선 던지는, 오! 징한 여자.
* 오적어 묵계(烏賊魚 墨栔)를 비유함. 오적어 묵계: 오징어 먹물로 글씨를 쓰면 오래 보존되지 못하고 증발하여 없어진다는 뜻으로 믿지 못할 약속이나 지켜지지 않는 약속을 카리킨다.
고경숙 시인 / 머리가 있는 토르소 (torso)
그리운 청동(靑銅)이다 탑골공원 담벼락은 늙어 참빗장수 몸을 기댈 때마다 밭은기침을 한다 호된 바람에 흩어지던 머리칼 안면을 휘감는 폭포수가 된다 빗질도 못하며 무슨 빗을 파냐고 사거리 신호등 차를 세울 때, 3월이 멀지 않은 어느 날 빗 하나 들고 돈을 건네다 무심코 허공에 헛손질 한다 나무통 위에 앉혀준 그대로 굳어있던 그, 생략된 사지(四肢)는 견고한 삶이 부식된 거라 착각하지 마라 실없는 약속 가식의 악수가 싫어 다만 손을 내밀지 않을 뿐 응축된 몸통을 조이며 세상 아무리 밀어붙여도 뒷걸음치지 않는 유배된 공복의 시간 흔들리지 않는 풍경 속에 고정된 푸른 토르소.
계간 『정인문학』 2006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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