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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서 시인 / 파랑새증후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1.

김명서 시인 / 파랑새증후군

 

 

  #메르카토르도법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밀려 방랑을 일삼는 좌, 큰 그릇에 세상을 담아라! 하고

  산밭에 호미로 불립문자를 새기는 우, 뛰지 말고 보폭만큼만 걸어라! 하고

  좌와 우

  집요하게

  지구본 양극에 23개씩 유전체의 못을 박았다

 

  한 손에는 이데올로기를 쥐고, 다른 손에는 불립문자를 쥐고

  무게중심을 잡아야 했다

 

  양팔저울에 올려놓은 핏줄의 필연성,

  좌와 우로 흔들리다가 수평을 잡는다

  슬쩍 좌의 말을 복사해 두고

 

  지구본에서 꿈의 행성을 다치지 않게 오려낸다

  100만 분의 1로 축척된 거리를 실제의 값으로

  환산한 후

  족보에 끼워둔다

 

  혈통의 절반이 허세와 체면에 덮여 있는

  엄숙한 가계도

  더 빨리

  더 속되게

  늙어버린 혈족들

 

  #꿈의 행성

 

  북위 37.6˚ 동경 127˚ 만화경 세상

  소비자는 왕이다

  불황일수록 광고지 카피는 거창하다

 

  나의 이목구비는 왕이 되기엔 불편하므로

  먼저 사냥법을 익히고 닥치는 대로 사냥을 하지만

  허기는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린다

 

  백화점 쇼윈도에서 백악기의 밍크와 악어를 사냥해 왔다

  우아하고 지적인 걸음걸이를 익히는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탕진해 버렸다

 

  #바벨의 유혹

 

  구로공단의 순정한 노동을 압구정 로데오거리로 옮기고부터

  다시 찾은 정신과 의사

  시대를 바꾼 약을 처방해 준다

 

  도서관에 들러 전태일과 밀턴 프리드먼을 빌려와 맛도 모르고

  책장을 한 장씩 뜯어먹는다

 

  거대한 자본이 경제개발을 빙자해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다

  역사는 노동자의 희생을 기록하지 않았다

  이것은 오래된 진리

 

  신용카드를 잘라버렸다

  그러나 도마뱀꼬리처럼 재생되어

  신용불량, 화려한 라벨 하나 더 달아준다

 

  #관성의 배꼽

 

   술이 목젖까지 차오른 날이면

   유적 속

   미완의 흉상들이 지나가고

 

  새된 기침소리

  사랑채 장지문을 열어젖힌다

  낡은 이데올로기

  힘없이 날아오르다가 두엄자리로 떨어진다

 

  억새꽃이 핀 불립문자

  그을음을 열고 나와서

   마당귀로 밍크며 악어를 끌고 가 불 지르며

  ㅡ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너라

  쉰밥 같은 잔소리 꺼내놓는다

 

시집 『야만의 사육제』(한국문연, 2016) 중에서

 

 


 

 

김명서 시인 / 얼음물고기

 

 

  별 입자가 구름 입자와 충돌할 때

 

  난반사된 불꽃들이 결합해서 잉태된 나는

 

  순수한 원자만의 집합체이다

 

  대양으로 나가는

  안전한 바닷길은 해일에 가려져 있다

 

  위험할수록 이성은 차갑게 빛나는 법

 

  살아남을 수 있다

  각오를 해저 동굴의 암벽에 저장해 두고

  몸통을 세차게 흔들어 조류의 흐름을 살핀다

 

  저온의 해수가 체온을 앗아간다

 

  낙조에 물들어 가는 몸에 얼음꽃 핀다

 

시집 『야만의 사육제』(한국문연, 2016) 중에서

 

 


 

김명서 시인

2003년 《시사사》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야만의 사육제』(한국문연, 2016)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