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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 시인 / 빛의 모서리
저녁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정류장에 앉아 나는 두 가지 이미지를 상상한다. 하나는 당신의 젖가슴 아래 붉은 반점이고 다른 하나는 맥도날드가 새로 만든 ‘시그니처 버거’의 기묘한 복고풍이다.
유리문 앞에서 풍선을 든 남자아이가 엄마 품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 모서리 저편에서 물고기들이 파닥거렸다. * 모서리는 희거나 검고 가볍거나 단단하다. 혀를 깊숙이 밀어 넣을 때마다 목구멍에서 흰 사각형이 쏟아졌다. 271번 버스가 연남동을 지나 홍대로 꺾어지고 합정역에서는 열한 명의 사람들이 내렸다. 당신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 우산을 펼치자 숨어 있던 햇볕이 후드득 떨어졌다.
대리석 무늬처럼 행간이 깊게 패였다.
우리의 비극은 어미를 잃은 새들이 함부로 버려진다는 것이다. * 가끔, 죽은 새들이 무릎을 접어 모서리를 꺼낸다.
석면가루가 휘날리는 비탈에는 벚나무가 발가벗고 있다. 트럭이 간신히 올라왔을 때 골목은 야구공처럼 구겨졌다. * 움켜쥔 조개는 단단한 껍데기를 벌리고 서둘러 굵은 모래를 토해냈다.
오로지 잊어버리기 위해서 빈 악보는 격렬하게 운다. * 당신을 둘러싼 빛의 폭우…… 내가 당신을 처음 본 골목 저편에서 모서리가 부서졌다.
천천히, 반복해서 부서졌다.
월간 『현대시』 2017년 6월호 발표
박성현 시인 / 리옹에서 하룻밤
여자는 딱딱해진 빵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접시에 담는다
버터가 묻은 나이프 옆에는 잘 익은 오렌지가 기울어져 있다 굴러가다 잠시 멈추었다
팔꿈치가 닳아버린 스웨터를 만지작거리며 여자는 녹나무 이파리 속으로 스며든다
그때, 윗입술에 설탕이 묻어 있다고 남자가 말한다 눈꺼풀이 천천히 닫히고
여자는 어두컴컴한 기록물 보관소에서 식어버린 혓바닥을 꺼낸다
하룻밤 만에 시꺼멓게 타버린 북쪽 해변 모래 숲에는, 아직도 눈사람들이 녹고 있을까
죽은 손끝을 들자, 남자의 손이 느릿느릿 따라 올라왔다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문예중앙, 2018) 중에서
박성현 시인 / 호텔 캘리포니아
그녀는 한적한 시골 다리를 건넜다 호텔 로비에서 여권을 보여주고 승강기 버튼을 눌렀을 때, 갑자기 귓속에서 춘자들이 미친 듯 날뛰기 시작했다 아이스넵이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는 광고문자 때문이다 타인과 무관한 삶이란 고장 난 변기와 같을까 그녀는 잘 익은 고깃덩어리처럼 웃었고, 한 번도 묵지 않았던 방이 죽도록 지루해졌다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문예중앙, 2018) 중에서
박성현 시인 / 폭염
아버지가 대청에 앉자 폭염이 쏟아졌다. 족제비가 우는 소리였다. 아버지는 맑은 바람에 숲이 흔들리면서 서걱서걱 비벼대는 소리라 말했다. 부엌에서 어머니와 멸치칼국수가 함께 풀어졌다. 땀을 말리며 점심을 먹는다. 아버지의 눈을 훔쳐본다. 여자의 눈을 쳐다보면 눈이 뽑힌다는 아랍의 무서운 풍습을 말한다. 석류가 터질 때 아버지는 다시 아랍으로 갔다. 그리고 어머니는 빗장을 단단히 채우고 방을 나오지 않았다. 세밑까지 어머니는 화석이 되어 있을 것이다. 기다리면 착해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내게는 마음이 없고, 문도 없었던 겨울이었다.
박성현 시인 / 한낮
버스가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멈췄다. 된장국 냄새가 솔깃하다. 골목을 돌고, 다시 골목 끝으로 가면, 저편에 집 한 채 기우뚱 있다. 연산홍이 피고, 떨어졌다가 다시 피는 5월에도 그 집은 비스듬히 서 있다.
녹 슨 파란색 철제 대문을 지나면 텃밭 같은 마당에 큰 개 한 마리 햇볕을 쬐고 있다. 몇몇 노승이 한 세월 돌아가면서 입고 다녔던 장삼처럼 곱게 펴져 있다. 시멘트 담 가까이 돋아난 풀잎이 흔들린다. 허기진 마음이 풀잎을 따라 바닥으로 잠긴다. 풍경 소리가 난 듯했으나 바람이 항아리를 울리고 간 소리다. 항아리에는 된장이 익어간다. 대청마루에 모시적삼을 입은 노부부가 나란히 세모잠을 잔다. 수백 년 전의 기억은 모조리 잊히지만 한낮에는 늘 되살아났다.
우체부 김 씨가 등기소포를 가지고 초인종을 누른다.
2009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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