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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제김영 시인 / 파이디아 2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5.

김제김영 시인 / 파이디아 2

- 숲이 되는

 

 

흐름이 매 순간 젊어지는 일에 힘을 쏟는다면, 머무름은 찰나마다 낡아가는 일에 집중할 뿐이지요. 부딪혀도 좀체 깨지지 않는 이 방식은 그냥 끈질긴 놀이이지요.

 

이국의 소금을 구하려고 당신이 인도양까지 다녀오는 동안, 나는 컴컴한 계곡에서 달을 보고 있어요.

 

계곡의 어둠은 비길 데 없이 씁쓸하지만 기연가미연가하던 것들이

분명해지는 아침에는 안개가 제일 먼저 타래를 풀어요.

 

기원이 다른 사유가 한 페이지에 머무르는 것은, 갈등을 부르는 존재 방식이었나 봐요. 누군가는 흘러야 하고 누군가는 머물러야 한다면, 머무르는 거 내가 할게요. 나뭇잎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을 격려해 주어야 한다면,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숲의 어깨를 지그시 다독여 주어야 한다면, 그거, 내가 할게요. 서로 같이 가는 것도, 서로 달리 사는 것도 숲의 한 이름이겠지요.

 

나는 이제 양말을 살 필요가 없어졌어요. 치밀하게 직조되었다는 양말을 골고루 신어봤지만 머무름의 매혹을 뛰어넘을 수가 없었어요. 흐름을 따라나서고 싶지 않아요.

 

서리를 담뿍 뒤집어쓴 나무들이 생의 결구를 지어요. 그걸 끝까지 받아쓴 달빛이 썩어가는 낙엽 사이, 거기 쟁여 있는 어둠을 열고 들어가 결가부좌해요.

 

월간 『현대시』 2018년 5월호 발표

 

 


 

김제김영 시인

1958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 1996년 시집 『눈 감아서 환한 세상』으로 작품 활동. 저서로는 시집으로 『다시 길눈 뜨다』, 『나비편지』와 산문집 『뜬돌로 사는 일』, 『쥐코밥상』, 『잘가요, 어리광』이 있음. 현재 한국문인협회 이사, 전북시인협회장, 김제문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