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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서하 시인 / 복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5.

김서하 시인 / 복도

 

 

 

  그는 천성이 과묵하다

  주인보다 먼저 입주한 그는 쿵쿵 뛰어오는 발소리를

  저장하고 입을 다문다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오는

  사람을 제일 먼저 반기는 것 또한 그의 몫

  들고나는 이삿짐의 행로도 추적하지 않고

  겹겹이 쌓이는 묵은 임대의 기록도 결코 내색하지 않는다

 

  복도란

  집의 겉옷 같은 것

  단추 같은 벨을 누르고 들춰보기 전까지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복도 끄트머리

  흔들거리는 공공근로 김씨의 불운에도

  그는 여전히 침묵한다

  막다른 벽에 부닥친 1401호 독거노인

  통로에 신발을 벗어두어도 냉기로 가득 찬

  그 집의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다

 

  정착지를 찾을 동안 잠시 머무는 임대아파트는

  집들의 낡은 소맷귀다

  소매를 접거나 펴거나 옷이 낡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몇 개의 짐을 다시 무심하게 배웅하고 흘리고 간

  소음 부스러기만 복도를 서성댄다

  간혹 빗나간 꿈에 화풀이하는 사람들로

  긴장하는 복도, 저 밑은 벼랑이다

 

  빽빽한 침묵의 행간, 그의 몸에 서서히 균열이 보인다

  복도의 어깨가 기울어지면

  여기저기 터진 솔기 사이로 비명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시집 『나무의 세 시 방향』(시산맥, 2016) 중에서

 

 


 

 

김서하 시인 / 지루한 필사

 

 

  봄볕은 알람처럼 예리하다

  이른 봄,

  차가운 콘크리트 담벼락이 반응한다

  피가 도는지 바람이 비릿하다

 

  점자처럼 더듬거리던

  손가락이 뒤엉킨 것은 지난여름

  난해한 계절, 무언가를 잔뜩 감추고 있었다

  그늘을 이어 붙여 무성한 그림자를 조립하는 중이었다

  그때, 담벼락은 배후처럼 숨어 있었다

  그가 어디쯤에서 진로를 변경할지

  누가 누굴 이용을 하는지, 이용을 당하는지

  얽힌 자와 기댄 자가 누구인지

  참으로 난해한 질문이었다

 

  부드러운 관절은 그에게 유리했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벽이 생겨났다 방음벽도 등을 내밀었다

  먼지와 소음이 팔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 와중에도 여백을 남기지 않는 버릇은 여전했다

  필생을 다해 기록한 서체는 대부분 흘림체였다

 

  몇 권의 계절을 베끼느라

  힘줄만 도르라진,

  차가운 겨울담쟁이의 캘리그라피

 

  닫힌 담벼락이 펼쳐진다

  지루한 복습이다

  여백을 채우는 필사가 시작될 것이다

 

시집 『나무의 세 시 방향』(시산맥, 2016) 중에서

 

 


 

김서하 시인

전남 광주에서 출생. 2012년 《평화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 『나무의 세 시 방향』(시산맥, 2016)이 있음. 제14회 산림 문학상 수상. 현재 <시: 새김> 동인. 국립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 석사 재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