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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순영 시인 / 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5.

홍순영 시인 / 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

 

 

  젖기 위해 태어나는 운명도 있다

 

  누군가는 탈출하기 위해 자신의 뼈 하나쯤 예사로 부러뜨리며,

  골목에 쓰러져있기도 하지만

 

  뾰족이 날만 세우고 좀체 펴지지 않는 고집도 있다

  그런 것은 십중팔구 뼈마디에서 붉은 진물을 흘리기 마련,

  정지된 시간 위로 녹슨 꽃 핀다

 

  사람이나 동물에게만 뼈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거

  기민한 종족들은 물과 돌, 쇠에도 뼈가 있음을 일찍이 알아챘다

  어긋난 뼈를 문 우산, 길 위에 젖은 채 쓰러져있다

  그도 내 집 담장 밑에 저처럼 누워있었다

  젖는다는 것은 필연처럼 물을 부르고

  눈물에, 빗물에, 국 한 그릇에 젖는 허기진 몸들

  젖은 몸으로 태어난 당신과 나

  살면서 몸을 말릴 수 있는 날은 의외로 적다

 

  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

  출발을 재촉하는 채찍 소리 도로 위에 쏟아지면

  날고 싶어 퍼덕거리는 새들 몸짓 요란하다

  기낭 속으로 반달 같은 슬픔 우르르 몰려들면

  둥글게 휘어지는 살들 팽팽히 끌어당기는 뼈

  긴장이 도사린 새의 발목은 차갑고 매끄럽다

  새의 발목을 끌어당기다 놓친 사내가 도로에 뛰어든다

 

시집 『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문학의전당, 2011) 중에서

 

 


 

 

홍순영 시인 / 내 의자의 이중성

 

 

무서운 것은 산꼭대기가 아니라 비탈이다

-니체

 

  식물은 동물을 꿈꾸고

  동물은 고단한 하루를 식물의 발등에 문지르며 저녁을 맞곤 하지

 

  당신은 나무의 눈을 들여다본 적 있는지

  몇 개의 계절을 감았다, 떴다 파르르 떠는 그 눈꺼풀을

  허공의 열쇠와 자물쇠를 갖고 다니는 구름의 거만한 자세에도 손을 거두지 않는,

  나무의 손끝이 불러내는 현란한 그림을 본 적은?

 

  내 의자는 네 발 달린 짐승처럼 종일 서서 나를 노려본다

  의자를 짐승으로 읽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는

  왜 내 의자의 식물성에 위로받는가

 

  꿈꾸는 것보다 항상 입에 몰두해야 하는 동물 곁에 연민을 키운다

  내 의자는 꿈꾸는 식물로부터 먹이를 찾는 짐승에게로 건너가고 있다

  내 의자가 비탈에 서 있다

 

  사랑하는 방식은 누구에게나 고유한 것

  나는 멀리서 나를 욕망하는 그를 바라본다

  기다림과 고통 끝에 멀미 같은 슬픔이 밀려오는 것을,

  동굴처럼 벌어졌던 그의 입이 서서히 닫히고

  눈빛 몽롱해지며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그가 주저앉을 무렵에서야 나는 그 곁으로 다가갈 것이다

  그에게 등을 기대고 어긋난 시간들과

  오래된 질문을 무릎에 늘어놓을 것이다

  기다림으로 피곤해진 그의 다리에 다시 뿌리가 돋아날 때까지

  그의 곁에 머물 것이다

  그쯤에 이르러 내 사랑은 좀 더 분명해진다

 

  나는 욕망덩어리 짐승에게서 꿈꾸는 식물로 돌아서는 의자를 꿈꾼다

  내 의자가 비탈에 서 있다

 

 


 

홍순영 시인

인천에서 출생.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11년 《시인시각》으로 등단. 시집으로 『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문학의전당, 2011)가 있음. 2011년 제13회 수주문학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