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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일남 시인 / 천직(天職)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5.

정일남 시인 / 천직(天職)

 

 

  아버지는 염장이었다

  죽은 자의 몸을 치장하는 미용사

  수의를 입히고 염포로 시신을 묶는 일

  죽은 자와 소근 소근 밀담을 나누었다

  마지막 가는 길이 어둡지 않도록 미용술이 빛을 발했다

 

  죽은 자는 자기가 죽은지를 모른다

  태어나는 아기가 태어나는지를 모르듯이

 

  아버지는 죽은 자가 별을 볼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죽은 자의 표정에서 완성된 작품을 읽었다

  염장이는 죽은 자의 미용사

  아버지는 죽은 자의 몸에서 꽃피었다

  죽은 자여, 그대는 아버지의 작품이니

  이승에서 저승으로 아버지는 넘나들었다

  아버지는 병풍 뒤에 저승을 숨겨두고 혼자 즐겼다

 

  나는 아버지의 염장 업을 이어받지 못했다

  죽은 자와 소통하는 비법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

  나는 나의 죽은 시를 염하지도 못하고

  그냥 불살라버렸다

 

시집 『훈장』(시와에세이, 2012) 중에서

 

 


 

 

정일남 시인 / 고백

 

 

  꽃 파는 상점 앞을 지나면 거기 우수를 핥고 있는

  내 언어의 욕망들은 피어있네

  어긋난 인연의 몹쓸 사랑도 너는 피어 있느냐

  꽃들은 저마다 실연(失戀)한 얘기를 들으려고 눈을 껌벅이네

 

  시(詩) 한 편을 팔아 꽃을 사면 여자는 두근거리게 좋아했지

  내 시는 밥상과는 거리가 멀고 쌀통을 비운 채 춤추었네

  가련한 꽃들아

  허기진 사랑들아

  슬픔이 꽃을 찾아가는 도중에

  우연히 슬픔끼리 만나 오누이처럼 다정했지

  꽃들은 남의 잔치만 축하해주었지

  자신들의 돌잔치는 없었네

 

  무덤이 반달 같이 생긴 것은

  살아온 자의 삶이 겨우 반만 완성한 때문인데

  조문 가는 꽃다발은 말이 없었네

  내가 끼어들 말이 도망갔다네

 

시집 『훈장』(시와에세이, 2012) 중에서

 

 


 

정일남 시인

삼척에서  출생.  1970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어느 갱 속에서』(1985), 『들풀의 저항』(1991), 『기차가 해변으로 간다』(1997), 『야윈손이 낙엽을 줍네』(2000), 『추일풍경』(2004), 『유배지로 가는길』(2005), 『훈장』(2012) 등이 있음. 2007년 한국시인정신상 수상. 2009년 천강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