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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승민 시인 / 쌍계사를 떠나는 거북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5.

박승민 시인 / 쌍계사를 떠나는 거북이

 

 

  게릴라성 호우가 밀물처럼 절 마당에 들어온다

  좌계(左溪)와 우계(右溪)가 용틀임치는 계곡으로 나 이제 떠나고 싶네

  살아서 지은 죄

  한 천년쯤 선사*를 등에 태우고

  한 발짝도 산문(山門)을 나가지 않았으면

  그만 탕감되지 않았겠는가

 

  물위를 떠가는 하동 둥둥 십리 벚꽃 길

  지나고 지나서 섬진강변 매화마을 마저 지나서

  남해의 미조항까지 흘러가야겠네

 

  서해와 남해의 파도가 만나고 헤어지는 그 어디쯤에

  깎아지른 12폭 병풍 같은 노을은 없어도

  등 하나는 따뜻하게 가릴 수 있는 조선소나무나 한 수 거느리고

  나, 다시 한 천년쯤 그 무엇도 아닌 채

  부표처럼 떠다니고 싶네

 

  여기도 아니다 싶으면 네 발로 어설프게 헤엄쳐

  머나먼 쪽빛 속으로 그냥 가라앉았으면 좋겠네

  수만리 심해의 산호초 옆에 바윗돌 하나로 비스듬히 누워

  벌겋게 물들어오는 오색단풍이나 구경하다가

  그러다가 더 쓸쓸해지면 낮잠처럼 고요히 숨을 놓겠네

 

*선사는 진감선사를 말하며 그는 통일신라후기의 유명한 고승으로 귀부에 세운 탑비에는 고운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

 

시집 『슬픔을 말리다』(실천문학, 2016) 중에서

 

 


 

 

박승민 시인 / 막돌

 

 

막돌의 일생은 외전(外傳)에 가깝다. 풍검(風劍)에 스친 여러 획의 주름살은 세월의 자객을 피하지 않았다는 이력. 자신에게 할당된 어떤 사랑을 안고 쓰러졌다는 기표가 뒤통수에도 뚫려 있다. 가슴에 단 유일한 흑점은 누군가를 보내고도 잊지 않겠다는 자신만의 다짐. 문양(紋樣)을 지움으로써 몸체만으로 자신을 설명하려는 저 막돌의 빛나는 의지가 야전(野戰)의 별자리를 단전중심으로 모은다. 무문(無紋)으로 가기위해 내부를 담뱃불로 지지듯 홀로 악무는 어떤 수양이 밤새도록 물소리를 물 밖으로 밀어낸다.

 

시집 『슬픔을 말리다』(실천문학, 2016) 중에서

 

 


 

박승민 시인

경북 영주에서 출생. 숭실대 불문과 졸업.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지붕의 등뼈』(푸른사상, 2011)와 『슬픔을 말리다』(실천문학, 2016)가 있음. 2016년 제2회 <박영근작품상> 과 동년 <가톨릭문학상>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