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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상미 시인 / 매일매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6.

김상미 시인 / 매일매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매일매일 나는 사라진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사라져

  매일매일 나는 딴사람이 된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딴사람이 되어

  매일매일 내가 알고, 나를 알던 사람들을 잃어간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떠나보낸다

  아무리 나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 쓰며 붙잡고 있어도

  매일매일 나는 나를 놓치고, 사람들을 놓치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게서 멀어진다

  그런데도 차임벨은 울리고, 공과금과 세금고지서는

  어김없이 내게로 배달되고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계속 가는지도 모른 채

  공과금을 내고, 세금을 내고, 시계태엽을 되감으며

  매일매일 나를 바라본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금이 가는 나를

  두려움도 없이

  연민도 없이

  수치심도 없이

  놀라움에 눈만 커다랗게 뜬 채

  매일매일 균열하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붕괴되어 죽어가는 나를!

 

계간 『시인수첩』 2017년 여름호 발표

 

 


 

 

김상미 시인 / 일산 호수공원에서

 

 

  수호와 성해랑 일산 호수공원 자작나무 숲길에서

  사진을 찍는다

 

  자작나무는 백석 시인의 사랑, 북방의 나무인데

  신기해라, 일산에도 자작나무 숲이 다 있네

  우리는 마치 고향이 먼 북방 어디쯤 있는 백석의 아해들처럼

  찰칵찰칵 셔터를 누르며 사진을 찍는다

 

  어디선가 연노랑흰나비 한 마리 날아와

  우리들 머리 위를 선회한다

  김기림이 백석을 만나러 왔나 봐!

  우리는 깔깔거리며 웃는다, 봄기운 만연한

 

  호수공원은 아름답고, 호수 안에 내려앉은 구름은, 하늘은

  아직 항해를 시작하기 전 돛단배처럼 황홀하게

  우리들 눈길을 사로잡고, 사로잡고

 

  그 짧은 순간에도 제각기 마음속으론 시를 생각하는지

  내면 깊이에서 지중지중* 원고지 넘기는 소리

 

  오랜만에 만나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차를 마시고

  그렇게 일상은 다시 흘러흘러

 

  흰색은 더욱 하얗게

  파란색은 더욱 파랗게

  오늘 찍은 이 사진들 또한 희미해지겠지만

 

  북방의 신비로 계속 자라나는 자작나무 숲에서

  우리는 오래 잊고 있던 백석의 「백화」**를 꿈꾸며

  눈 푹푹 쌓이는 마가리*** 어디쯤에서 또 셔터를 누른다

 

  진짜처럼, 진짜처럼

 

* 백석의 시에서, 지중지중: 곧장 나아가지 않고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나타내는 의태어. / ** 백석의 시 제목 / ** 백석의 시에서, 마가리: 오막살이

 

계간 『사이펀』, 2017년 가을호 발표

 

 


 

김상미 시인

1957년 부산에서 출생. 1990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그녀와 프로이트 요법〉 외 8편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산문집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와 『검은, 소나기떼』, 사랑시 모음집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당신』 등이 있음. 박인환 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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