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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기인 시인 / 표고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6.

이기인 시인 / 표고

 

 

  안개 지팡이를 따라온 웃음은 그치지 않고

  어제 만졌다가 만지지 않은 이슬의 귓불은 아침에도

  오늘은 어제도 오늘처럼 다가오는 말을 바구니에 수북이

  너의 불안이 한 뼘으로 펴지는 우산을 보다가

  잣나무 위에서 멧비둘기가 잠시 지켜보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말은 다행으로 오늘까지만 알아들을 수 있어서 좋아

  참으로 거짓말처럼 많은 죽음이 굵어지는 참나무와

  착하게 태어나는 동그란 거울이 누구의 피부인지 모르는

  잠시 눈을 뜨려고 하지 마, 순조로운 빈혈을 낳아줄게

  얌전하고 가느다란 엄지와 검지와 허우적거리는

  창백함을 따내고 바라보는 그늘은 전생의 냄새로

  고운 숨을 이어온 그리고 거친 숨을 쉬었던 상처투성이

 

계간 『시산맥』 2018년 여름호 발표

 

 


 

 

이기인 시인 / 여러 번 걸어가는

 

 

  애매한 모양의 바위는 비로소 무언가를 굽어보고

  운동화를 신은 바람은 바위와 굽은 길을 떼어버리고

  그가 좋아하는 하얀색은 자기도 모르는 머뭇거림으로

  눈동자만 걸어가는 길에서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누구와 누구를 데리고 다니며 또 떼어놓은 벌어짐을

  서로가 벗어놓은 짐들이 많은 길을 여러 번 걸어가는

  이번의 삶은 하얀색 운동화 끈이 묶어놓은 매듭으로

  조금은 오르막으로 수척해지는 햇빛을 함께 짊어지고

  낡고 무거운 걸음이 뒤로 물러서지 않도록 뒤뚱거리는

  풀어놓은 그늘의 부스러기를 끌어모으는 수양버들

  애매하게 기울어진 바위는 계속 무언가를 굽어보고

  심심하여 불러보는 이름을 모르는 바람에게 주고서.

 

계간 『애지』 2018년 여름호 발표

 

 


 

 

이기인 시인 / 지금 나하고 바다 갈래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문의 열쇠는 눈을 감은 표정

  호주머니 속에서 놀라 일어나는 울음은 바닷가 쪽으로

  약속 장소를 잃은 새들이 찾아와서 나란히 앉은 전깃줄

  해넘이를 오래 본 쓰레기통의 어두운 귀와 망가진 눈썹

  조금 싫어서 밀어놓았던 말들이 되돌아오는 물의 골목

  해변을 열고 들어가는 조개껍데기와 가슴이 투명한 소주병

  어서 들어오라고 소리 지르는 문을 부수는 빗물

 

계간 『미네르바』 2018년 여름호 발표

 

 


 

이기인 시인

1967년 인천에서 출생.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ㅎ방직공장의 소녀들〉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창작과비평사, 2005)과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창비, 2010)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