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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령 시인 / 사막으로 간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7.

이령 시인 / 사막으로 간다

 

 

사자, 원숭이, 낙타, 토끼와 함께 가는 길, 목이 마를 쯤, 난 토끼들이 뛰노는 선인장 밭을 지나고 있고 갈기가 거추장스러운 사자는 미련 없이 버린다.

 

노을에 잠긴 토끼들의 눈이 하루치의 햇살을 머금고 붉게 익어간다.

 

토끼들이 아가베 속처럼 영글고 나의 사막엔 간간히 비가 내리고 길이 무너지기도 하지만 간혹 원숭이들이 찾아와 더운 입김으로 손을 녹여준다.

 

등을 내주던 낙타가 등을 보이며 멀어져 갈 때 토끼들이 내 신발 끈을 물고 잘근거림으로 안녕이라 할 새도 없이 밤은 오고 다시 아침이 열리고 사막엔 끝없는 길이 나고 있다.

 

사자를 버리고

원숭이를 저버리고

낙타를 떠나보내고

토끼가 남은 사막

 

함께 한 이들을 생각 한다. 보이기 위해 피는 꽃은 향기를 덥고 멀리 가는 길의 발자국은 자취를 지우고 라플레시아 꽃잎 속쯤이 나를 스쳐간 흔적들의 먼 근원이었으리라. 이 밤, 사막의 결은 같이 걸었던 이들의 온도로 차분해 진다.

 

어둑한 길에서 야성이 돋는다. 문드러진 발이 되어야 온기를 얻을 수 있던 사자를 데려와 나는 다시 사막으로 간다.

 

원숭이, 낙타, 토끼도 따라와 밤하늘에 오르고 달무리에 어리는 시간들 쏟아져 나를 베끼는 밤, 사막에는 마음이 좌표다.

 

격월간 『시사사』 2016년 3~4월호 발표

 

 


 

 

이령 시인 / 글라디올러스 그녀

 

 

그녀와 내통하던 프리젤리 칵테일 바, 그 집 이름이 내려지는 통에 내 속엔 잔 바람이 일고 있어요. 지붕 끝에는 아라베스크 둥근 달이 고갤 내밀어 그녀의 만삭 배가 출렁이고 있구요. 그녀는 커피포트를 잘도 타일러 골목 구석구석 삼부카 아니스 향길 피워 올렸죠. 그때마다 나는 은비늘 햇살과 뉴에이지풍의 음표를 쏟아내는 아라베스크 둥근 지붕에 올라갔어요. 그녀가 하루치의 햇살을 걷어내면 알레포 티포트 뚜껑 옆에 붙어 벌름벌름 코를 세웠죠.

 

오늘도 그녀는 궁전 지붕에 올라 내려피는 글라디올러스 꽃잎 하나씩 따고 있겠죠. 언젠가 나는 밤새 밤보다 깊은 새벽길을 걸으며 그 향기에 가슴을 베었구요. 그녀가 열어논 아치 창문 너머 나는 기린처럼 목을 빼고 아라비아 푸른 별을 바라봤어요.

 

나는 그녀 손에 들린 화이바 커피잔, 비워도비워도 채워지는 만삭의 잔, 나는 살면서 내려지는 이름들을 그녀에게 전하려다 점점 동글동글 모가 닳아요.

 

월간 『우리시』 2018년 5월호 발표

 

 


 

이령 시인

경북 경주에서 출생. 동국대 법정대학원 석사, 시사사 신인문학상, 한국문학비평가협회이사, 동리목월기념사업회이사. 문학동인Volume 회장, 웹진시인광장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