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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혁재 시인 / 신기료장수는 애인이 많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7.

권혁재 시인 / 신기료장수는 애인이 많다

 

 

  구두를 벗어 맨발을 내놓고

  차례를 기다리는 여자들

  발냄새가 날 법도 한 맨발과 구두를

  외간남자에게 버젓이 내놓는

  여자들의 익숙한 몸짓이

  애인에게 애교를 부르는 듯 떳떳하다

  한번쯤 애인의 손길이 되어

  굳은살 박힌 발바닥을 쓰다듬어 달라는지

  발가락으로 꼼지작거리며 신호를 보낸다

  또 한번쯤은 애인의 발이 되어

  그녀가 흘린 눈물자국을 따라

  또각또각 좇아가고픈 구두들

  만지는 구두마다 땀내가 불불거리는

  신기료장수의 집에는 애인이 많다

  굽높은 애인부터 굽낮은 애인까지

  닳은 굽만큼 사랑을 채워달라는

  애인들이 많다

  구두를 닦고 신발을 깁어도

  늘 지울 수 없는 애인의 발냄새가 난다

  신기료장수에게는 향긋한 발냄새가 나는

  애인들이 참 많다.

 

시집 『고흐의 사람들』(지혜, 2016) 중에서

 

 


 

 

권혁재 시인 / 참깨꽃들에게

 

 

  우리 이제 부끄러워하지 말자

  더 이상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바닥으로 숙이지 말자

  우리는 한낱 좁쌀만한 씨앗에도

  서로를 낯 뜨겁게 붙들고

  바람처럼 지나가고

  비처럼 지나오기도 하였다

  저 건너편 어느 밭에서는

  우리보다 큰 씨앗을 품었던

  엉터리꽃과 잡초들이 되려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물러터진 세상을 흔들어댔다는데,

  우리 이제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말자

  잘 생긴 뽀얀 얼굴을

  땅바닥으로 숙이지도 말자.

 

시집 『고흐의 사람들』(지혜, 2016) 중에서

 

 


 

권혁재 시인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 단국대학교 국문학과와 同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토우〉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투명인간』, 『잠의 나이테』, 『아침이 오기 전에』, 『귀족노동자』, 『고흐의 사람들』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