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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숙 시인 / 또 봄날이 와도
장날이면 외할머니는 우셨다 “하늘로 솟았나 땅 속으로 숨었나” 하얀 무명 저고리에 떨어지던 붉은 꽃잎들, 지게 뒷짐에 꽂혀 있던 진달래 꽃잎, 꽃잎 한입 가득 물고 통치마 펄럭이던 아이는 화들짝 놀라 섬돌에 넘어졌다 습자 시간에 정성들여 쓴 아버지 세 글자가 책가방 속에서 자꾸만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하얀 치마폭, 얇은 화선지에 소로시 담겨지던 파르스름한 아이들 먹물도 채 마르지 않은 아버지의 먹그림 앞에서 어머니는 울지 않으셨다
장날이면 외할머니는 우셨다 유월의 햇빛이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던 앞마당, 석류와 장미꽃이 만발하던 뒤란, 배꽃이 환하게 피어나던 우물가, 온통 짙은 먹물을 뿜었다 나는 먹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밤새 호야불 밑에 습자지를 꺼내놓고 먹을 갈았다
또 봄날이 와도...... 이제 나는 눈을 감고도 아버지 세 글자를 먹물이 번지지 않게 습자지에 반듯하게 쓸 수 있다 내가 써 놓은 글자들을 보시며 여든의 어머니는 이제서야 우신다 내 마음에 묶어놓은 수만 장의 습자지 뒷면에 아버지의 모습이 얼비친다면서
시집 『하늘새』(황금알, 2007) 중에서
정영숙 시인 / 견진성사, 그 이후
풀무의 타오르는 불꽃 앞에서 그는 제대로 두 눈을 뜰 수 없었다 물과 불 속을 번갈아 담금질을 수천 번 메질을 수만 번 온 몸 한군데 성한데 없이 두들겨 맞으며 앏은 종잇장처럼 펴고 있는 대장장이의 손 안에서 오랫동안 뭉쳐있던 응어리가 풀려 나가고 있었다 물과 불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닫혀 있던 목울대가 터지며 울음을 깨뜨렸다 나이테처럼 생긴 수천 개의 골마다 맑고 고운 음색을 지닌 징으로 그는 태어났다
그때부터 나는 새벽 가을 강가에 서면 은어빛 물속에 웅크리고 있는 한 덩어리의 방짜놋쇠를 만나곤 한다
시집 『물 속의 사원』(문학아카데미, 199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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