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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시인 / 멜랑콜리커의 발
가만한 발에 검정 바다가 왔다 그만이라는 발바닥에 가장 검정 바위가 알을 슬었다
작은 뭉게구름은 백 톤에서 천 톤의 무게다 사십 마리에서 사백 마리의 코끼리가 하늘에 떠 있다는 거다 그러니 구름은 가벼워서 뜨는 게 아니다 구름보다 더 무거운 바람이 구름 아래를 침범했기에 뜨는 거다
처음엔 다음 바다를 믿었으나 소음된 믿음이 바람을 불렀다 검정 구름이 폭음처럼 더 높이 솟구쳤다
별이라도 있었으면 그렇게 금세 쏟아지지 않았을 텐데 뭐든 가만 참다보면 줄이 풀리고 발을 적시는 건 순간 발이 젖었으니 넘칠밖에 쏟아질밖에 발도 없이 달려오는 검정 바람에 소문의 파고가 높았다 미상과 불명의 침몰일수록 오래 유출되는 법
매미처럼 울었다 같은 곳에서 멈춰 같은 곳을 노래하다 같은 곳에서 길을 잃고 같은 곳으로 쏠렸다 개미처럼 사소해졌다 발이 없으니 번개가 날개였고 안개가 베개였다
물었던 걸 또 묻는다 되묻는 간격이 점점 짧아진다 물을 때마다 다른 인생에 가까워진다 묻고 묻다보면 신생아가 될 것 같다 검정 바다에 가까워질 것이다
천 날의 발이 젖었으니 천 날의 발을 잃었으니 오늘도 사이렌과 세이런으로 떠가는 중이다
오늘도 검정이라는 사어를 인양중이다
계간 『문학들』 2018년 봄호 발표
정끝별 시인 / 별것 아닌 것
서태후가 즐겨 먹었다는 천진포자 옆구리가 터진 채 배달되었다 삐져나온 부추가 시큼했으나 별것 아닌 것
■가 멀리 있을 뿐, 선한 농담처럼 고백컨대
로스코 채플에서 카스트라토가 ■를 노래한다면, 피렌체 라우렌치아나의 늙은 사서가 ■를 읽는다면, 그건 우-와-한 별것
아닌 게 아니지만, 별것 아닌 것들에 지쳐 별것을 잃으면 다시 다 별것 아닌 것들
세상 너인 듯 멀찍이 ■를 부른다 별것 아닌 것들의 지나친 피로에
떨고 있는 남편 카에시나 포에투스의 단검을 빼앗아 제 가슴을 찌른 후 돌려주며 아내 아리아가 말한다
봐요, 별것 아니잖아요!
순간인 것,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떠난 ■ 뒤로 내가 완벽히 사라지는 것도
별것 아닌 것들이 별똥별처럼 쏟아진다, 눈을 감으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무주의 우주가 펼쳐졌어, 홍역을 앓던 시절의 한낮의 헛것들은 머리에 흰 수건을 둘러쓴 뒷모습이었어, 과다출혈의 쇼크 상태에서 들었던 살아있는 자들의 목소리들, 아버지는 내 혈액형을 모르셨지,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면 눈이 멀고 숨이 멎는다는데, 봐서는 안 될 것만 같았던 꿈속 그 물가는 어느 생에서 봤던 풍경일까, 그러나, 눈을 뜨면 눈앞을 날아다니는 날파리처럼 웅성거리는 별별 것들
그때마다 ■를 불렀어 마지막이라고 별것 아닌 것들이라고 되새기면서
디그니타스, 선택과 결단이 묻어나는 소리다 사랑의 아모레니타스, 자유의 리베르타스가 이웃한 디그니타스 디그니타스, 디스토피아의 과거완료형만 같고디즈니랜드의 미래완료형만 같다
별것들은 흔드는 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나야말로 더 이상 별것 아니라는 듯 응답하곤 했는데
모든 사망은 사고사예요 스키드마크도 없고 현장보존스프레이도 없고 폴리스라인도 없이 내가 낳은 ■가 날 부정하고 내가 너무 슬퍼서 서서히 늙어죽는 죽음이 가장 긴 사고예요
평생을 이렇게 손 흔들며 부르고 있는데, 부르자마자 금세 잊히는 이방의 이름만 같은, ■야, ■여,
봐요, 별것 아닌 거라구요, ■도!
월간 『현대시학』 2017년 7월호 발표
정끝별 시인 / 천돌이라는 곳
목울대 밑 우묵한 곳에 손을 대면 그곳이 천돌
쇄골과 쇄골 사이 뼈의 지적도에도 없이 물집에 싸인 심장이 벌떡대는 곳 묶였던 목줄이 기억하는 고백의 낭떠러지
와요, 와서 긴 손가락으로 읽어주세요 아무나가 누구인지 무엇이 모든 것인지
묻어둔 술통이 따뜻해질 즈음이면 잉크빛 목소리들이 저녁 안개처럼 스며들고 혼잣말을 하며 헤매는 발자국이 하나둘 늘어나요 어떤 이름은 파고 또 파고 어떤 이름은 묻고 또 묻고 애 초에 없었던 어떤 이름은 바람에 밟히기도 해요 심었다 쓰러지는 함몰된 희망에 호미자루가 먼저 달아나기도 하는데요 그럴 때면 눈물의 밀사가 관장하는 물시계 홈통에 물 듣는 소리가 들려요
와요, 어서 와서 중지의 지문을 대주세요 지도에도 없는 천 개의 돌을 열어주세요
발소리도 없이 들었다 잠시의 별을 피워냈던 서리입김 유리컵처럼 내던져진 너라는 텍스트의 파편과 인도코끼리만큼이나 무거운 오해의 구름들, 그리고 지리멸렬에 두 발이 묶인 지지리한 기다림이 기억의 물통에 채워질 때마다 망각의 타종소리가 맥박처럼 요동치는 곳
뜻밖의 지금을 살게 한 천돌이라는 그곳 어떤 이름을 부르려 달싹이는 입술처럼 천 개의 숨이 가쁜 내 고통의 숨통
월간 『현대문학』 2017년 9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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