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은상 시인 / 하이델베르크의 고독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8.

김은상 시인 / 하이델베르크의 고독

 

 

몽상적 폭설이다. 고양이와 함께 잠들어 흘러가는 방이다. 내 나이에 걸맞은 곁이 없다는 것을 자책하면서. 더듬더듬 곁이 슬퍼 황도십이궁을 꿈틀거리면서. 몇 명, 아니 몇 그루의 하이델베르크를 예감하면서.

 

무너진 하이델베르크를 헤아린다. 저녁을 다해 낮을 노력해도 땀은 그리움처럼 헐값이었다. 나는 언제나 신세지는 금치산자로 읽혀진다. 온통 꽝뿐인 뽑기 놀이에 놀라지 않은 척했지만 친구들의 웃음이 떠나간 공중에 홀로 앉아 긴 한숨을 건져내며 하얗게, 하얗게 웃어보기도 했다.

 

나는 죽어서도 무명을 살아가겠다. 이것은 운명에 대한 나의 가없는 우정. 바람의 태내에서부터 감사만큼 근사한 변명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급성간염이 간경화가 되고 간암이 된다. 나에게 진화란 오로지 그런 것이다. 배에 복수가 찼을 때 내일이라는 위험한 표정은 달 속에 묻어버려야 했다.

 

그러나 무명이란 이런 것이 아니지. 이름이 없으므로 태어난 적도 없지 않은가. 비로소 나는 무명의 잉태와 숨결을 느낀다. 이제부터 페가수스는 하이델베르크의 생일이다. 선의의 어머니가 악의인 것처럼. 피의 온기가 오히려 불온인 것처럼. 하이델베르크가 나를 지상의 유령으로 걷게 한다.

 

하이델베르크는 방의 기침. 하이델베르크는 뽑기 구술. 하이델베르크는 고양이가 뱉어낸 창틀. 창틀에 앉은 나는 낭만의 파르티잔. 온통 일요일인 방의 축농증이 밤의 등뼈에 쌓여간다. 사랑을 완성하는 것은 불멸이 아니라 충만한 이별이다. 기린의 목소리로 외치는 폭풍 같은 혁명. 그곳에서 탄생한 나는 하이델베르크의 전락이다

 

계간 『시작』 2018년 봄호 발표

 

 


 

김은상 시인

2009년 《실천문학》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유다복음』(한국문연, 2018)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