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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녀 시인 / 이석(耳石)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8.

김지녀 시인 / 이석(耳石)

 

 

이것은 귓속에서 자라나는 돌멩이에 관한 기록이다

 

귓가에 얼어붙는 밤과 겨울을 지나 오랫동안 먼 곳을 흘러왔다

시간을 물고 재빠르게 왔다 부서지는 파도의 혀처럼

모든 소리들은 투명한 물결이 되어 나에게 와 덧쌓이고

뒤척일 때마다 일제히 방향을 바꿔 내 귓속, 돌멩이 속으로 돌돌 휘감겨 들어간다

 

이것은 소리가 새겨 놓은 무늬에 대한 기억이다

 

돌멩이의 세계에는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

창문을 닫고 누워 처음으로 지붕이 흘려보내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캄캄한 밤을 떠다니는 한 마리 물고기에 불과했다 몸에 붙어 있는 비늘을 하나씩 떼어 내고 조금씩 위로 올라가 지붕에 가닿을 듯 그러나 가닿지 못하고 지붕 위에서 소리들은 모두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유연하게 사라졌다 빗소리가 해를 옮기는 동안, 내 귀는 젖어 척척 접히고 나는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아 갔다 천천히 단단해지며 돌멩이가 또 한 겹, 소리의 테를 둘렀던 것이다

 

언젠가 산꼭대기로 치솟아 발견될 물고기와 같이, 내 귓속에는 소리의 무늬들이 비석처럼 새겨져 있다

 

시집 『시소의 감정』(민음사, 2009) 중에서

 

 


 

 

김지녀 시인 / 밤과 나의 리토르넬로

 

 

어젯밤은 8월이었어요 날마다 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 사람들의 등 뒤로 여름이 가고 있지만 가을은 오고 있지만  나는 아직 한 장의 얼굴을 갖지 못한 흉상  여름과 가을 사이에 놓인 의자랍니다  나는 체스의 규칙을 모르지만  우리를 움직이는 밤과 낮의 형식을 좋아해요  눈을 감았다 뜨면  감쪽같이 비가 오거나 목소리가 변하거나  나무들이 푸르러졌어요  누군가 피를 토하면서도 다리를 꼬고 있다면  그건 죽음에 대한 예의일 것이고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면  그건 나에 대한 의심일 테지만  나는 너무 조금밖에 죽지 못했다고 말할 거예요  사소한 바람에도 땅을 움켜잡는 나무가  의자에 붉은 잎사귀 몇, 뱉어 놓는 밤에  나의 입안에선 썩은 모과 향이 꽃처럼 확, 피었다 지고 있어요

 

# 리토르넬로 (음악)  [ritornello] : 이탈리아어로 '돌아오다'라는 뜻으로 음악에서 대조되는 성격의 삽입악구들 사이사이에서 반복되는 부분

 

시집 『시소의 감정』(민음사, 2009) 중에서

 

 


 

김지녀 시인

1978년 경기도의 양평에서 출생. 성신여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제1회 《세계의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시집으로 『시소의 감정』(민음사, 2009)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