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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가경 시인 / 낙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8.

박가경 시인 / 낙관

 

 

  발자국으로부터 시작되는 계절이다

 

  조금씩 열리는 수평선을 잠재우며

  손가락 끝에 힘을 조절 한다

 

  당신 몸에 쌓아 두었던 언표들이 흘러나오고

  우리의 낡은 웃음들이 테두리를 만들기 시작 한다

 

  칼끝을 따라 들려오는 당신의 음성을 가두기 위해서는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잡음 따윈 버려야한다

 

  이것은 당신 바깥을 향한 디테일이다

 

  우리가 키운 전생이 시들지 않게

  나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않는다

 

  칼이 지나간 자리마다 채워지는 당신의 숨소리

  경계의 끝에서 휘청거림으로 매달려 있다

 

  발자국에서 흘러나온 낮과 밤이 뒤엉킨 채 분명해지고

  베어지는 것이 새로 태어나는 거라고 당신은 말하지 않는다

 

  서리는 내리지 않게 할 것이다

  하나의 당신이 서로 다른 수요일을 피어나게 했더라도

 

  이력이 되는 단 하나의 대답이

  통보가 아니라 마침표가 되더라도

 

  이제 당신의 선언을 단단한 나무속에서 증명 할 수 있다

 

 계간『미네르바』 2018년 봄호 발표

 

 


 

 

박가경 시인 / 잔설의 온도

 

 

​당신은 왜 내게 잔설로만 남아있을까

  얼지도 녹지도 않은 채 그 만큼의 온도로만.

  가장자리에서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으로 밀려나지도 않은 채

  감정을 적당한 온도로 숙성하고 있는 애매한 태도라니

  잔설 속으로 꾸역꾸역 날짜들이 들어가고 있다

  영하권으로 떨어지지 않는

  감정이 없던 그늘의 날들

  녹으려는 순종과 녹지 않으려는 버팀 사이로

  바람이 나를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나는 얼음을 새긴 질문 몇 개를 던져놓고 빠져나온다

  당신은 왜 떠나지도 못한 채 흔적을 고집하는가

  이것은 최초인가 최후인가

  나는 나를 열지도 닫지도 못한 채 어정쩡과 무작정을 품는다

  빙점까지 내려갔다 되돌아오던

  반복을 이젠 끝내야 하는가

  잔설의 뿌리가 황홀도 없이 빛나고 있다

 계간『열린시학』 2017년 여름호 발표

 

 


 

 

박가경 시인 / 무임승차

 

 

  멈춰서고 나서야 비로소,

 

  취객 대신 황사 대신 제비를 손님으로 모셨다

  버스 맨 뒷자리 천정 귀퉁이에 덩그런 흙집 하나

 

  지지배배 지지배배 집집마다 집집마다로 들리고

  울음은 명랑하고 좌석은 넘쳐난다

 

  제비가 가려는 행선지는 어디일까?

  식구란 입들을 저렇게 동시에 벌리는 것인데

  둥그런 입 속으로 벌레며 꽃향기며 햇살 한 모금이 들어가는 것인데

 

  기름 냄새가 구렁이처럼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다

  야만스런 입을 벌리고 꿀꺽, 야생 울음을 삼키려는 듯

 

  제비 새끼들의 미래를 가늠하다 하늘은 눈을 감고 만다

 

  바퀴가 뽑혀도 맥박이 없어도 가고 싶은데

  버스가 향하던 곳을 보니 잡풀만 싱싱한 폐답이다

 

  고양이 한 마리 어둠을 할퀴며 불쑥 뛰어든다

  태우지 말아야할 손님이란 하나도 없는데,

 

  풀벌레 소리만 만원이 되어 폐차장 안을 휘감고 있다

 

 


 

 

박가경 시인 / 언니에게

 

 

  그 많던 언니들은 어디로 갔나

  정지는 세 번

  출발은 두 번

  조련사처럼 툭툭 옆구리를 치며

  오라이 오라이, 외치던

  힘이 센 언니들은 어느 막차를 탔나

 

  나의 처녀가 언니를 찾아 나선다

  정류장에도 이정표에도 없는 언니가 거울 속에 있다

  동생들을 토큰처럼 줄줄달고

  비포장 언덕길도 마다않고 백원 때문에 매달리던 언니가

  독백을 먹고 연명하면서

  아직 끝내지 못한 안내가 있다는 듯 흑백으로 서있다

  생리주기나 당신과 나의 서로 다른 현관 비밀번호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면 위에 가면을 덮어쓰거나

  눈동자 속 남자를 들키거나

  새벽 두 시의 잠꼬대를 반복하거나......, 그녀가 웃는다

  네 번째 자리에서 울고 있던 아이에게 손을 내밀며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 했던,

 

  언니를 벗고 또 벗는데도 언니는 떠나지 않는다

  태초에 언니가 있었다는 듯

  모든 남자가 언니라는 듯

  피곤으로 가득 찬 버스에 매달려 있는 나를 놓지 않고 있다

  난 이미 자웅동체의 몸이 되어

  낮과 밤을 한꺼번에 서성이고 있는데

  머뭇거림이 상처라는 듯 오라이 오라이만......,

 

 


 

 

박가경 시인 / 탁본

 

 

폭염 아래 피어난 채송화는 싱싱해요 저 혼자 피어 현장을 증언해요

 

무너진 벽돌담 그 아래 찾아가지 않은 고지서, 기한 지난 독촉장을 바람이 대신 읽고 또 읽어요

 

개 밥 그릇은 눈동자로 진화하고 있어요 올려다보고 있는 건 작열하는 태양, 찌그러진 채 직시하고 있는 건 싱싱한 균열

 

운동화 한 짝이 깨진 유리를 밟고 서서 녹슨 대문이 쓰러지는 걸 보고있어요

 

뼈를 잃어버린 담쟁이가 가야할 방향을 찾아 두리번거릴 때,

 

채송화는 발목에 힘을 주지요 슬프지 않다고 다짐해요 더 이상 낮아질 곳이란 없다고 위로해요

 

야무지게 다져진 슬픈 감정이 물관을 타고 올라가 붉은 색을 덧칠하고 있을까요?

 

끝까지 피어서 나비를 불러들이고 싶었나 봐요 아무리 둘러봐도 찬란한 고요뿐인데

 

처마 밑을 쭈뼛거리던 그늘이 가계를 읽지 못한 채송화를 부르고 있어요

 

저 축축한 몸뚱이는 마중일까요 배웅일까요

 

해는 자꾸 멀어지고 어둠의 숨결이 마당을 향해 걸어오는데, 꽃의 입술이 닫히기 시작하는데

 

아직 돌아올 누군가가 있다고 오래된 감나무가 말을 해요

 

붉음이 다 사라지기 전 채송화는 이곳이 이곳으로 텅 비어 있음을 알 수 있을까요 빈 집의 탁본을 뜨고 있는 것이 하늘뿐이라는 것을

 

 


 

 

박가경 시인 / 어떤 참선

 

 

  진건면 신월리 314번지, 빈집 하나 참선 중이다

 

  대문 밖 서성이던 햇빛

  지나온 발자국들 덧대고 있는 오후

 

  고집 센 코뚜레가 걸린 외양간

  간신히 척추를 추스르고 있는 담벼락

 

  한 자세로 100년을 버티는 건 왜 이리 어려울까

  말없이 말라가는 우물을 무소유라 부르는 건 억지일까

 

  식은 상태에서도 고요가 그을리고 있는 부뚜막

  찬장 안 양은도시락엔 선문답처럼 쥐똥이 놓여 있다

 

  끝내 없는 것을 호명하는 태도마저 지워야 하는데

  아궁이의 큰 눈이 설움으로 이글거리고 있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집을 지키던 기왓장 하나 툭! 떨어진다

  포기하지 말라고 마당의 정수리를 내리친다

 

 2015년 《열린시학》 등단시

 

 


 

 

박가경 시인 / 의빙(疑氷)*

 

 

  나는 칼을 믿는데 칼은 나를 믿지 않나봐

  등을 내게로 향한 칼이 정직함을 강조하고 있어

 

  누군가의 심장을 썰어 팔팔 끓는 물에 넣을 생각일지도 몰라

  내 손가락에 갑자기 오한이 들었어

  저 팔딱이던 몽상이 눈동자 속으로 나를 밀어 넣고 있잖아

 

  칼날 속에 살고 있는 파란만장도 지금 이 순간을 조금씩 조금씩 삼키고 있어

  진정 칼이 판독 하려는 무늬는 무엇일까

 

  도마에 도착하지 못한 비명들이 내 정수리 안쪽까지 다가와

  칼의 움직임보다 노련하게 나를 흥분하게 해

 

  나는 리듬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손목와 어깨를 같은 속도로

  흔들어 보지만 그것이 발작을 잡지는 못 할 거야

 

  칼날 끝에서 흐르는 물컹한 감정은 나의 것일까 너의 것일까

  살과 살 사이에서 칼은 무슨 증거를 찾고 있는 걸까

 

  붉게 흐르던 우여곡절이 이제는 도마 위에서 시들어 가고 있어

 

*풀리지 않는 의심 덩어리

 

 격월간『시사사』 2017년 3~4월호 발표

 

 


 

박가경 시인

1969년  경기도 남양주에서 출생.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졸업. 2015년  <<열린시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