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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성희 시인 / 잠수종(diving bell)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8.

배성희 시인 / 잠수종(diving bell)

 

 

한낮의 태양이 문을 닫고 나갔다 계속, 쿵쿵 울리는 가슴을 무시하고 까만 그물스타킹을 신었다 손가락 끝으로 구멍 하나하나를 찌르며, 확대 렌즈로 찍은 달팽이 구애 장면만 거듭 돌려보았다

 

그해 겨울은

죽어가는 산세베리아 줄기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낮게 뜬 구름자락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입 냄새가 길게 남았다 이불 바깥은 차디찬 강물, 겨우내 누워있을 이유로 충분했다 달빛도 호프만의 뱃노래도 없지만, 물뱀은 짝짓기를 했다 그 옆에서 오래오래 진저리치며 오줌을 누고

 

나는 깊어졌다

시간이 접히거나 펼쳐지는

공간을 느끼고 싶었다

 

체리 맛 분홍시럽에 흠뻑 젖은 채 쓰러져, 생각하는 단어모양 그대로 팔다리가 붓처럼 흐느적거렸다 추위와 어둠의 소용돌이 가운데

 

그 모든 겨울을 보내고

산세베리아는 말라비틀어졌다 마지막 고개를 쳐들고 있던 유일한 줄기, 그것이 누구이든 나였다* 짙은 그늘에서도 광합성 하는 엽록소

 

오그라든 허파에

푸릇푸릇 심지를 키우던

 

* 그것이 누구이든 나였다 : 임영태 소설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 문」에서

 

시집 『악어야 저녁 먹으러 가자』(서정시학, 2011) 중에서

 

 


 

 

배성희 시인 / 악어야 저녁 먹으러 가자

 

 

  축구공을 꿰매느라 노예처럼 일하는

  아이들, 아쿠아리움 속 우리도 다를 바 없다

 

  신神 지핀 순간

  내가 너를 사랑해서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문지기를 노려보는 것은 목숨을 거는 도전

 

  뜨는 거야, 텅 빈 가짜 벌통은 걷어 차버려

  담뱃불로 구멍 난 소파 틈새 털 짐승이 뛰쳐나오고

  더러운 침대에서 신음하던 물이 단칼에 쏟아져 나올 때

 

  멀고 먼 약속의 활주로는 지루해

  폭우를 헤치고 힘차게 도는 프로펠러

  따다다다 헬리콥터가 수직으로 달아오른다

 

  늪이 악어의 수만큼 있는 마을

  이마에 온통 피 칠을 한 인디언 입에서

  코에서 연기가 뿜어 나온다

  짙푸른 숲이 채찍을 휘두르는 지금 뜨거운

  접목의 나무 수액은 황홀하게 발효중이다

 

  주린 배를 채우러 가자 악어야

  아마존으로 가자

 

시집 『악어야 저녁 먹으러 가자』(서정시학, 2011) 중에서

 

 


 

배성희 시인

이화여대 생물과 졸업. 2009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악어야 저녁 먹으러 가자』(서정시학, 2011)가 있음.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