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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승희 시인 / ‘알로라’ 라는 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30.

김승희 시인 / ‘알로라’ 라는 말

 

 

  알로라

  내 말 좀 들어봐,

  나, 지금, 여기, 이탈리아야, 베네치아,

  고독하지, 뭘, 여기서는 고독해도 괜찮아,

  (배가 새고 있는데)

  알로라, 입안에 굴려보면

  말을 걸 사람이 있어지는 것 같은 느낌,

  알로라, 라는 말 참 좋아,

  나 이탈리아 말 한 마디도 모르는데

  왁자지껄 한 속에서도 그냥 그 말이 귓가에 들리는 거야

  알로라, 라고

  이탈리아 어 왁자지껄 하지,

  성대한 꽃다발이 이탈리아 어 속에 왔다 갔다 하고,

  전화를 걸고 처음 하는 말이 알로라, 라면

  좀 이상하지, 그들 사이엔 그 전의 통화에서

  하던 말이 있었던 거야,

  과거의 말이 있고 현재의 말이 있고

  내일 할 말이 있어서, 그래서 알로라가 오는 거야,

  시간을 접속하는 거야, 뭘 연결하는 거야,

  길을 가다가 알로라

  말을 하다가 알로라

  싸우다가 알로라, 울음을 그치고 알로라

  알로라, 나 배가 고파,

  그런데 이건 배고픔이 아니고 보고픔인 것 같아,

  미소를 지으며

  알로라, 나 모레 떠나,

  알로라, 인생은 가고 또 오는 거잖아,

  알로라, 그럼 잘 가, 또 만나자고는 말 못해도

  알로라, 언젠가, 그 때 꼭 만나자, 바다를 향해 배를 타고

  (배가 새고 있는데)

  꼭 흰 돛단배를 타고 가야 해

  안녕,

  알로라,

 

* 알로라(Allora)는 이탈리아어로서 부사인데 그러자, 그러면, 그건 그렇고, 그 때, 느낌씨 저 등의 의미로 일상 대화에서 아주 자주 쓰이는 말.

 

월간 『문학사상』 2018년 4월호 발표

 

 


 

 

김승희 시인 / 이슬의 전쟁

 

 

  이슬은 죄 많은 세상 속으로 조간신문처럼 온다

  이슬은 뭐 그리 깨끗한 것도 아니다

  깨진 손톱이나 핏방울, 찢어진 눈동자나 이빨 같은 것,

  이슬 안에 그런 생지옥이 산다

 

  이슬로 세수를 하고 발까지 다 닦을 수는 없다

  이슬은 육체의 계획 속으로 오는 것은 아니다

  이슬 안에 스러지는 영원의 햇빛 속으로

  이슬은 차갑게 죽으러 온다

  이슬은 이슬을 애도하러 온다

 

  이슬로 와서

  이슬로 구르다가

  이슬의 전쟁을 마치고

  이슬로 지는 사람들이여

 

  신이 눈꺼풀을 한번 깜박일 때마다

  순간의 슬픈 보석은 밭으로 굴러 떨어진다

  전쟁이 끝난 밭에는

  풀잎마다 영롱한 이슬의 유언이 반짝반짝 묻어

  막 깨어날 듯한 기운으로 충만하다

 

월간 『문학사상』 2018년 4월호 발표

 

 


 

김승희 시인

1952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 서강대학교 영문학과와 同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이상 시 연구>로 국문과 박사학위를 받음. 1973년 《경향신문》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에도 당선. 시집으로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등이 있고,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33세의 팡세』, 『남자들은 모른다』,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등과  소설로는『산타페로 가는 사람』, 『왼쪽 날개가 약간 무거운 새』등이 있음. 현재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