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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재정 시인 / 저수지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31.

임재정 시인 / 저수지

 

 

 창고가 아니야, 쇠창살이 있으니까

 

  터널을 지나면 숨겼던 얼굴을 꺼내야 해

  그것은 어둠과 양 떼를 뒤섞는 일

  침묵해, 목소리가 달라질 거랬어

 

  헬륨을 통과하면 노랑에도 송곳니가 돋지

 

  신발 곰 인형 책가방 부르튼 입술 새끼손가락, 식인상어

  뱃속에서  진흙 사람들이 맞는 첫 밤처럼

 

  무슨 말인가 뱉어낼 듯 일렁이다가

  기슭을 미끄러지는 거품 사이 스티로폼 조각

  우린 어떤 것의 진면목일까 메아리를 허락하지 않는

 

  거대한 헝겊이 사각의 완고한 얼굴을 흔들 때

 

시집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문예중앙, 2018) 중에서

 

 


 

 

임재정 시인 / 피그미 아빠의 나른한 동물원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 기대어 친구를 기다려요 제제, 너도 방학이니?

 

제제가 채 답하기도 전에 배달되는 학습지, 첫 장 둠벙에 엉덩이를 들이민 동생이 소금쟁이로 따라듭니다, 귀찮아! 내가 아빠한테 배운 괜찮아, 로도 들리는 말, 동생의 물탕이 쪽잠 든 아빠 소파를 간지럽힙니다

 

달랑 목소리만 선잠에서 깨어 우릴 어르는 아빠, 둠벙 저쪽 라임 오렌지나무는 나처럼, 언제나처럼 쓸쓸합니다

 

밤낮의 경계는 붉은 입으로 어흥! 하구요 갓 켠 나무 냄새를 문 아빠의 하품은 동물원을 펼쳐냅니다 동물들은 다 아는 얼굴입니다 밤새 일하는 긴밤지새우는 아빠 팔뚝에 숨고요 위층에 사는 두 발 달린 네 발 짐승 울보떼보나무늘보는 천장을 쿵쿵거리죠 대체 잠은언제자누가 달아난 길로 사탕사자 응? 칭얼대는 동생, 어디에나 그림자인 척 하이에나도 따라 붙습니다 피그미아빠가 야근을 가면 금세 동물원도 지워지죠 우린 훗날 될 동물 얼굴을 달고 서로 어깨를 묻습니다

 

봄방학은 손잡이에 엉긴 아이스크림만큼, 좁은 집은 어디든 구석인데 우린 반죽처럼 뒤채고 부풉니다 베란다를 빠져나간 햇볕은 밤새 어디서 무얼 부풀리려는지

 

제제를 기다릴 동안 영구치가 흔들리는 이를 밀어냅니다 욱신욱신, 동물원이 줄어듭니다

 

시집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문예중앙, 2018) 중에서

 

 


 

 

임재정 시인 / 아파트

 

 

   저마다 끄고 켤 수 있는 네 모서리를 원했어  

   붉은 눈을 보면 붉은 눈이 되지

   우르르, 광장에서

   시장으로 가구점으로 마침내

   한사람만 입에 제 발가락을 물고 삼킬 수 있다면

   기어이 모두의 꿈에 조금씩 아쉬운 서랍장을 구해 각자 웅크릴 수도 있지

   칸마다 잠금장치가 있고, 얏호!

   20년 할부의 감옥을 구했다네

   우로보로스, 축제의 시작이야

 

계간 『문학들』 2018년 봄호 발표

 

 


 

 

임재정 시인 / 내가 심박을 걸어 밤의 스웨터를 짤 때

 

 

1.

 

손가락을 찔린 김에

쓴다, 심오할 것도 모자랄 것도 없이

붉게

천박하기로 아무 상처에서나 꽃피는 심장의 발걸음이지만

 

실핏줄 터진 봄볕을 땀땀 기워 당신이 입는다면

소박한 이는 꽃이 두렵다지

자, 여기 실을 뽑아 기둥코를 세운다 심장을 몸을 올올 엮어 세움코로

 

당신에게로 가는 붉은 발바닥이다 발길이 엮는 매듭과 매듭

 

그러나 당신의

언제부턴가 달아나기만 하는 털실뭉치인 고양이

당신을 걸어야겠네, 나는 검으니 당신은

더욱 붉어라

 

2.

 

당신은 왜 내 울음의 등에서 까르르 웃나

잘못된 배색, 내가 짜는 꿈은 붉어서 검은 열두 폭

골목 끝 숨죽인 나는 낮조차 밤, 패배자의 지하

손가락을 깎는다, 당신의 밝기로 지새는 내겐 구석도 없고

 

당신은 사실 어둠에 잇대어진 나입니다만, 한 번만 돌아봐주시겠습니까? 나를

 

3.

 

모두를 사랑하는 이, 애인은

내 등 뒤에서 숨겨둔 사랑을 들키고

 

나는 눈을 찌른 지 오래, 당신을 더듬어 당기면

떼구르르, 굴러가는 실 뭉치

 

손 뻗으면, 수염이 쫑긋 일어섰던 두 귀가 발톱이 이빨이 왁자하니 엎질러진 붉음이

뜨개질은 계속된다

눈앞이나 등 뒤나, 여긴 도무지 모를 곳입니다

 

계간 『문학들』 2018년 봄호 발표

 

 


 

임재정 시인

충남 연기에서 출생. 2009년 《진주신문》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문예중앙, 2018)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