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 / 대추벌레
달콤한 과즙의 단맛에 취해 아작아작 정신없이 씹고 있는 틈을 타서 너는 손쉽게 내 몸속으로 잠입에 성공한다 이제 너는 나를 엿보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모를 것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장소와 시간에 따라, 사람에 따라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수시로 말 바꾸고 행동 달라지는 변화무쌍함을 지켜보는 하루하루가 참 재미날 것이다 고리타분하고 지루했던 지난날과는 비교가 안 될 것이다 조마조마하고 짜릿짜릿한 일일드라마가 연속될 것이다
부모 속이고 친구속이고 함께 사는 아내마저 속여먹고 살아온 뻔뻔스런 두 얼굴의 사나이를 잘난 척, 아는 척에 익숙해진 몸 인정사정없이 갉아 먹어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벌레만도 못한 못난 놈 피 빨아먹고 내장 파먹는 일에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 모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수시로 배가 아픈 것은 위염이나 역류성식도염 때문이 아니라 부드러운 내장부터 갉아먹기 시작하는 바로 너 때문일까?
오늘도 살살 배가 아프다
계간 『사람의 문학』 2017년 겨울호 발표
전인식 시인 / 세한도 속으로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누군가 만들어 놓은 책속의 길 따라 쫓는 나에게도 봄은 올까, 노래할 수 있을까
환호 지르며 세상 한가운데 알몸으로 뛰쳐나갈 유레카의 순간을 위해 오늘 나는 사철 내내 눈발 펄펄 날리는 세한도속으로 저벅 저벅 큰 걸음으로 걸어들어야겠다
솔가지 부러뜨리는 바람 가슴 안으로 받으며 사각의 흰 세상 밖 어디론가 간절히 손 뻗는 곳으로 흐르는 더운 피 한 점 갈라터지는 몸속에 숨길 수 있다면 봄 햇살 그리워 흘러내리는 눈물들 주렁주렁 허연 소금덩어리 고드름으로 얼어붙는 눈 못 뜨는 형벌로 서 있어도 괜찮아라
세상 가득한 눈밭 다 녹을 때까지 겨울을 인내하다 껑껑 얼어붙은 내 몸 핏빛 붉은 진달래 꽃잎으로 눈을 뜰 때 비로소 살아 한번 가질 기쁨으로 눈부실 것을
나는 오늘 사철 내내 눈발 펄펄 날리는 세한도속으로 저벅 저벅 큰 걸음으로 걸어들어야겠다
웹진 『시인광장』 2016년 2월호 발표
전인식 시인 / 마흔 근처
잠깐 졸았을 뿐인데 눈을 떠보니 사막 한가운데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 길인지 희미하다 분명한 것은 머리맡에 놓인 서너 개의 보따리들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모래언덕을 넘어가야 한다는 것
무거운 짐 싣고 갈 낙타는 꿈속에 보았던 동물 밤하늘 별빛을 해독할 점성술을 익혔으면 좋았으련만 잠시 쉬었다 갈 오아시스가 어느 쪽에 있는지 기러기 날아가는 곳이 남쪽인지 북쪽인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바람이 등 떠미는 쪽으로 가면 행운이라도 따를까
어디로 가야할지 물어볼 사람도 없다 엄마와 아버지는 왜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을까 왜 미리 사막을 건너가는 법을 물어보지 않았는지 여태 내가 정신 팔고 다녔던 일들은 무엇이었을까
호수 하나 만들고도 남았을 흘렸던 눈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간절하게 그리운 눈물방울 하나하나 몸 안에 숨길 수 있는 선인장을 닮아야 할까 꽃도 버리고 잎도 버리고 온 몸 가득 가시를 달아야 하는 마흔 근처
계간 『시인정신』 2018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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