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전인식 시인 / 대추벌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31.

전인식 시인 / 대추벌레

 

 

  달콤한 과즙의 단맛에 취해

  아작아작 정신없이 씹고 있는 틈을 타서

  너는 손쉽게 내 몸속으로 잠입에 성공한다

  이제 너는 나를 엿보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모를 것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장소와 시간에 따라, 사람에 따라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수시로 말 바꾸고 행동 달라지는 변화무쌍함을

  지켜보는 하루하루가 참 재미날 것이다

  고리타분하고 지루했던 지난날과는 비교가 안 될 것이다

  조마조마하고 짜릿짜릿한 일일드라마가 연속될 것이다

 

  부모 속이고 친구속이고

  함께 사는 아내마저 속여먹고 살아온

  뻔뻔스런 두 얼굴의 사나이를

  잘난 척, 아는 척에 익숙해진 몸

  인정사정없이 갉아 먹어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벌레만도 못한 못난 놈

  피 빨아먹고 내장 파먹는 일에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 모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수시로 배가 아픈 것은

  위염이나 역류성식도염 때문이 아니라

  부드러운 내장부터 갉아먹기 시작하는

  바로 너 때문일까?

 

  오늘도 살살 배가 아프다

 

계간 『사람의 문학』 2017년 겨울호 발표

 

 


 

 

전인식 시인 / 세한도 속으로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누군가 만들어 놓은 책속의 길 따라 쫓는

  나에게도 봄은 올까, 노래할 수 있을까

 

  환호 지르며

  세상 한가운데 알몸으로 뛰쳐나갈

  유레카의 순간을 위해 오늘 나는

  사철 내내 눈발 펄펄 날리는 세한도속으로

  저벅 저벅 큰 걸음으로 걸어들어야겠다

 

  솔가지 부러뜨리는 바람 가슴 안으로 받으며

  사각의 흰 세상 밖 어디론가

  간절히 손 뻗는 곳으로 흐르는 더운 피 한 점

  갈라터지는 몸속에 숨길 수 있다면

  봄 햇살 그리워 흘러내리는 눈물들 주렁주렁

  허연 소금덩어리 고드름으로 얼어붙는

  눈 못 뜨는 형벌로 서 있어도 괜찮아라

 

  세상 가득한 눈밭 다 녹을 때까지

  겨울을 인내하다 껑껑 얼어붙은 내 몸

  핏빛 붉은 진달래 꽃잎으로 눈을 뜰 때

  비로소 살아 한번 가질 기쁨으로

  눈부실 것을

 

  나는 오늘

  사철 내내 눈발 펄펄 날리는 세한도속으로

  저벅 저벅 큰 걸음으로 걸어들어야겠다

 

웹진 『시인광장』 2016년 2월호 발표

 

 


 

 

전인식 시인 / 마흔 근처

 

 

  잠깐 졸았을 뿐인데 눈을 떠보니 사막 한가운데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 길인지 희미하다

  분명한 것은 머리맡에 놓인 서너 개의 보따리들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모래언덕을 넘어가야 한다는 것

 

  무거운 짐 싣고 갈 낙타는 꿈속에 보았던 동물

  밤하늘 별빛을 해독할 점성술을 익혔으면 좋았으련만

  잠시 쉬었다 갈 오아시스가 어느 쪽에 있는지

  기러기 날아가는 곳이 남쪽인지 북쪽인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바람이 등 떠미는 쪽으로 가면 행운이라도 따를까

 

  어디로 가야할지 물어볼 사람도 없다

  엄마와 아버지는 왜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을까

  왜 미리 사막을 건너가는 법을 물어보지 않았는지

  여태 내가 정신 팔고 다녔던 일들은 무엇이었을까

 

  호수 하나 만들고도 남았을

  흘렸던 눈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간절하게 그리운 눈물방울 하나하나

  몸 안에 숨길 수 있는 선인장을 닮아야 할까

  꽃도 버리고 잎도 버리고

  온 몸 가득 가시를 달아야 하는

  마흔 근처

 

계간 『시인정신』 2018년 봄호 발표

 

 


 

전인식(全仁植) 시인

1995년 선사문학상 시 당선. 1995년 신라문학 시부문 대상. 1996년 통일문학상공모 시부문 대상. 1997년 《대구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1998년 불교문예 신인상 수상.  현재 불교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