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순영 시인 / 무지개다리
눈도 코도 입도 닫힌 채 강물은 그를 싣고 둥둥 떠내려갔다 산이 일어섰다 나무에게 눈을 주었더니 고개를 돌렸다 바위에게 주었더니 바위도 눈을 돌려버렸다 풀도 새도 여치도 개미도 하늘도 ...
삼경이 주먹 안에든 지금 어디서 온 손일까 그의 팔을 다리를 묶고 목을 조이며 에워싼 손들 ... 기둥 세우고 벽을 바르고 지붕으로 올라앉았다 그는 숨이 끊어졌다 붙고 또 끊어졌다 붙고 웅성웅성 빛을 잡아먹는 손들 ... 묶고 조이고 묶고 조이고 ‘나고 죽는 게 하나’ 아니던가. 어찌하여 나는 하룻밤에도 죽고 죽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가
몸이 흔들였다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흔들리는 나무처럼 그는 휘어지다 비틀어지다 허공에 기대니 허공이 되었다
27년 만에 햇볕 만나던 날 거리에는 발 하나 디딜 틈 없이 가시가 돋아났다 벌들이 날아들고 윙윙거리며 에워싸고 쏘아댔다 그의 몸은 벌침의 집이 되었다
어둠을 싣고 왔던 배에게 등불 하나 어둠을 날려 보내온 바람에게 등불 하나 가시에게 등불 하나 나눠주고 돌아서니 히이이이잉 히이이이잉 울면서 흰말 검은말 달려왔다 그들을 하나하나 모셔다 만델라 무쇠 솥에 털어 넣고 불을 지폈다
우리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기 위해 내 목을 내 놓았다
불은 꺼지지 않고 오 년을 타서 잘 끓여진 눈물로 천여 년 겹겹이 쌓인 흑백의 터널을 걷어내고 무지개다리를 놓고 갔다 하늘아래 목숨이란 목숨들 골고루 나눠 마시는 (7월16일)샘을 파놓고 주먹 안에 갇힌 가슴을 지중해에다 풀어놓고
(7월 16일)은 * 만델라 생일. 유엔이 정한 봉사의 날.
계간 『애지』 2016년 봄호 발표
전순영 시인 / 떠도는 웅덩이
천 미터 달려가는 길 위에 웅덩이가 둥둥 떠 있다 바퀴가 빠지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목이 달아나도 웅덩이는 그대로 웅덩이
노동의 대가는 날개 달고 날아가 버린 빈창자를 거머쥐고 법의 문을 두드리지만 법은 죽은 지 오래 죽은 땅에서 죽음을 앞둔 후보들이 줄을 서 있다
노적봉을 쌓아놓고 갖다 바치는 자만 재상이 되는 ‘달리트’의 꿈이 깨져버린 조선은 웅덩이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머리를 비틀어 몸을 비틀어 땀을 비틀어 벽돌 한 장 한 장 쌓아 올라가면 ‘케이블’ 타고 와서 줄줄이 앉고 앉아버리고
눈을 씻고 찾아봐도 붙잡고 올라갈 수 있는 새끼줄하나 없는 몸 바닥에 내던져 굴리고 두들기고 깨지면서 시멘트가 되고 모래가 되고 물이 되고 길이 되는
오년을 백년을 그렇게 매달여온 발자국이 지금 쩌 엉 쩌 엉 쩡쩡쩡 깨지는 소리 저 소리 귀가 있는 자는 귀를 막을 것이요 눈이 있는 자는 눈을 감을 것이니
웹진 『시인광장』 2018년 2월호 발표
전순영 시인 / 검은 피
구두 수선공 아들로 태어난 스탈린 그는 12살 때 왼쪽 팔이 불구가 되었지만 시를 발표 하면서 강철 심장을 그늘에 담가놓고 ...
레닌의 그림자 밑에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계단 오를 때 끌어주고 밀어주던 친구들을 상석에 오르자 이런저런 이름으로 묻어버렸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발 동동 구르며 그가 보내온 겉보리를 컴퓨터에 넣고 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겉보리 한 알을 들고 들여다보며 이쪽을 벗기면 저쪽을 벗겨야했고 저쪽을 벗기고 보면 다시 이쪽이 껍질을 물고 있었다 힘껏 벗겨도 겉보리는 겉보리
여름 흉추(胸椎) 꼭대기에 올라앉는 나는 컴퓨터와 머리를 나누고 나누는데 방이 빙그르르 돌았다 나도 돌아갔다 눈을 감아 봐도 떠봐도 물레방아 돌아가듯 ...
더듬더듬 마당으로 기어 나갔다 돌아가는 하늘에다 나를 던져버렸다 ...... 파란바람을 타고 다시 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찧고 찧을 때 혓바닥에 무덤이 들어앉더니 번지더니 나를 차지해 버렸다
누런 그 무덤 속에다 나를 꾹꾹 눌러 담으며 겉보리가 밥이 된 지금 그는 뱀 허물인 양 눈 흘기며 나를 묻어버렸다 스탈린의 검은 피가 아직도 거기 있었던가
계간 『문에바다』 2017년 여름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나태주 시인 / 황홀극치 (0) | 2019.09.27 |
|---|---|
| 심상운 시인 / 봄바람 소리 (0) | 2019.09.27 |
| 조숙향 시인 / 어머니 방 외 2편 (0) | 2019.09.27 |
| 권수찬 시인 / 단단함을 빠져나가다 외 4편 (0) | 2019.09.27 |
| 김병호 시인 / 리트머스 루메 (0) | 2019.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