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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 시인 / 오존주의보가 내릴 무렵
베란다 창틀 앞에 서면 모든 그리움이 위험하다 모세혈관을 따라 퍼지는 바다의 지도는 부패한 낙엽의 물관 같고 내 피가 흐르는 어지러운 길에 마른 먼지가 날린다
나의 바다는 가뭄이 깊다 살 여린 치어들마저 먼바다로 쓸려 가고 절벽의 끝에서 홀로 눈물겨워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 그럴 무렵 수평선에 비낀 고압 전선 위에서 낮은음의 바람이 단조를 연주한다 바다는 지상과의 경계를 명암만으로 암시하며 항해의 바쁜 길에 비수를 품은 복병을 숨긴다
백일몽 속에서도 나를 만날 수 없다 식은땀에 흐르는 하얀 그리움 직사광선에 마르고 또 마르면 내 스스로 내가 되는 꿈 꿈속의 꿈에서 꽃피는 바다의 얼굴을 본다
뒤엉킨 혈관을 태양 아래 널어놓는다 이 도시의 소금밭에도 내 얼굴을 비출 거울처럼 환한 소금꽃이 필 시간이다
김종태 시인 / 치자꽃 그늘 옆에서
아름답던 기억이 멍빛으로 저물고 있다 한 생이 딴전 피듯 또 하나의 생을 준비하고 있으니 남겨진 꽃자리들 사이를 비집고 향기가 향기를 불러 한평생의 저녁을 황갈빛으로 염색한다 어린 꽃봉오리는 무채색의 이 세상에 연한 바람을 일으키려마 살아 마음에 멍 깊었던 사람아 나의 사랑아 조금씩 모습을 바꾸는 꽃그늘에 발 담그고 놀빛 서편 하늘에 더운 이마를 대어 보렴 마음은 생전에 갖고 싶었던 색깔들로 물들리라 날 다 저물면 이 처연한 꽃그늘을 데리고 먼 길 다시 떠나리라
김종태 시인 / 편도선이 부은 밤
목구멍에 건조주의보 내리네 미처 은폐하지 못한 말들이 서로의 눈빛을 살피며 아우성치네 베란다에서 키워 온 흰 아이비며 벤저민 잎들이 오갈 들어 내갈기는 참회의 글귀조차 온전하지 못하네 천장에 매달려 글썽이는 불빛은 장롱 뒤에 숨겨 놓은 소싯적 일기장을 낭독해 주네 창문은 바람의 수화로 숨겨 놓은 부끄러움을 일으켜 세워 눈물이 아랫눈시울에 걸려 흐르지 못하는 밤이네 지난 계절 피워 올린 화려한 형용사들은 우리의 삶을 얼마나 초라하게 했던가 내가 낳은 말들에게 내가 두들겨 맞네 말의 마라톤에 지쳐 말문이 막혔네 서랍 어디엔가 하얀 약 봉투가 있을 것 같아 목구멍에 숨어 있던 말들이 쓰디쓴 약 가루를 뒤집어쓴 채 서로에게 안부를 묻네 쉽게 죽음과 타협하지 않는 말의 빛깔들, 가슴은 텅 비어 있는데 한 사발의 더운물을 마시며 떳떳한 말들을 곱씹고 싶네 마음이 따뜻해지면 언젠가 목구멍 속에 날들기도 할 것이네
김종태 시인 / 해후(邂逅)
속 빈 열매가 열리는 나의 꿈, 꿈속의 꿈, 늦가을도 다 지난 그 꿈속의 꿈에서 너는 수만 가지 모습으로 일어서고 있다 세월의 모서리를 돌고 돌아 나는 추풍령을 넘고 최루 가스를 마시고 제기동 허름한 밥집에서 식권을 끊고 북악산 기슭으로 흘러와 캄캄한 지하실 보일러의 온도를 올린다 한기를 견딜 수 없는 날이면 간혹 차를 몰아 서울의 밤거리를 휘젓곤 한다 열매를 다 떨구어 버린 채 나무, 가지가지 그리운 모습으로 인사동 네거리 혹은 황학동 뒷골목에서 달무리를 타고 내려와 빛바랜 이파리를 날개인양 파닥거리는 나무, 상처뿐인 나이테, 우리의 초야가 스쳐온 시간을 헤아릴 수 없다 무심한 세월, 이제야 아픈 내 꿈에 나타나 둥글게 잠을 흔들어도 나는 기상하지 못한다 뭉개지는 발가락, 너마저 부서지려나, 매연을 따라 증발하는 저녁 이슬을 먹으면 오갈 든 네 손등 위에 나무껍질 같은 허기가 돋는다 도토리 벼락이라도 맞았으면, 한 사나흘 기절했으면, 바늘처럼 가늘어진 네 신경이 굳은 살 가득한 내 어깨를 찌른다 꿈 깨라고 어서 일어서라고, 겨울비라도 오면 주저앉을세라, 우리 몸 비비며 피워 올린 꽃불이 켜켜이 콘크리트 바닥에 피어나고 있다
김종태 시인 / 새벽의 보일러 소리
그가 그리울 땐 보일러가 돌아간다 보일러가 멈추면 죽을 끓인 마음이 잠시 식는다 잠시일 뿐 부글부글 보일러가 돌아간다 보일러가 돌아가도 마음은 그립지 않으리라고 그립지 않아도 보일러가 칭얼대리라고 바닥의 동파이프 속으로 수많은 물방울들이 지루한 길들을 돌아갈 때마다 메마른 벽지에 눈물을 닦으며 한없이 중얼거린다 지나간 길들은 보일러실에 쌓아 둔 허드레 세간일 뿐이라고 돌아오는 목소리 마음의 변죽을 울리고 등허리 복판에 불꽃이 흘러내린다 살 타는 냄새가 방 안에 진동할 무렵 안간힘 바동대도 마음의 동력을 지울 길 없지만 누워 생각하면 보일러의 스위치를 내릴 수 없다 보일러가 돌아가다 과부하가 흘러 붉은 쇳물로 녹아내리는 날 나지막하게 엎드린 고철 같은 그리움도 녹물 되어 썩어갈 것이다
1998년 《현대시학》 11월호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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