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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술 시인 / 날아다니는 섬 ―제니스 조플린*에 대한 기억
폭양 아래, 저 검붉은 소금창고의 양철지붕 위는 얼마나 뜨거울까 올라가 벌거벗고 누워 살을 지져버리고 싶은 한낮의 권태 사이를 새들은 구름처럼 날아올라 보이지 않는 섬 쪽으로 날아갔다 옥수수는 개펄을 가릴 만큼 자랐고
비닐장막처럼 드리워진 햇빛을 뚫고 날카로운 폭발음과 함께 둑길을 달려온 누군가 오토바이 꽁무니에 여자를 매달고 옥수수밭으로 쳐들어갔다 머릿속을 쑤셔대듯환장하게 높고 느린 제니스 조플린의 목소리가 옥수숫대를 분지르기 시작하고
―오 베이베베이베베이베 돈 도오온 돈 유 크라이
그날 밤 별들이 알약처럼 하얗게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같은 여자들을 생각하며 우리는 서슴없이 입을 벌려 마른 별들을 삼키고 이빨로 기타줄을 물어뜯으며 둑 위에 나뒹구는 술병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어이 저기 보여? 제니스 조플린이 더러운 잿빛 머리카락을 날리며 날아가고 있군 미친놈 여기가 브룩클린이나 맨하튼인 줄 알아 저건 너무 익어버린 옥수수 수염이라구 낄낄낄
―아빠는 부자 엄마는 바람난 멋쟁이 그러니 우리가 울 리가 없지
그녀를 흉내낸 기묘한 노래 사이사이로 오 그녀는 황홀한 섬 그녀만이 날 살아 있게 해 언젠가 난 그녀에게 가 닿고 말 거야 속삭일 때마다 비영신 그건 한낱 돌무더기에 불과한 부인도일 뿐이라구 우리가 가 닿을 수 있는 곳은 없어 이 폐항처럼 저 빈집을 뒤지고 다니는 비루먹은 개들처럼 버려진 거야 우린 살아 있는 게 아닌 게지
아침이 와도 우리가 삼킨 별들은 꺼지지 않고 머릿속에 매달린 백열등인 양 흔들렸다 스위치를 내려 스위치를 누군가 잠꼬대하듯 중얼댔지만 우리에게 스위치는 없었고 흐느적거리는 제니스 조플린의 노래는 멈추지 않고 개펄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소금으로 가득 차오르는 머리를 흔들며 눈을 떠보면 누군가의 발자국이 개펄을 가로질러 바다로 떠나버린 뒤였고 우리는 서로의 눈을 피하여 돌아서서
―제기랄 저건 그저 물새의 발자국에 불과한 거야
태양은 고문하듯 녹슨 양철지붕을 두들겨대기 시작하고 콜타르가 되어 녹아내릴 듯한 제니스 조플린의 노래는 노오랗게 현기증을 일으키며
―서머 타임 타아임 탐탐탐탐 앤드 리빙 이즈이지
세상을 온통 소금밭으로 만들어버릴 듯
* 마약과 약물중독으로 사망한 70년대의 전설적인 여성 록 보컬리스트.
김형술 시인 / 가을 감기
문 밖에 누워 바람 속의 문풍지와 같이 몸을 떨며 우물처럼 깊은 잠의 수렁으로 떨어진다 잠 속에 거울 하나빠안히 눈뜨고 앉아 거꾸로 떨어지는 나를 지켜본다
네게선 악취가 나
얼굴을 찡그리고 돌아서는 사람들 등에다 대고「아니다 나는 죄 없다」외치려 하니 입 속에서 말라버린 꽃잎들팔랑팔랑 날아올라 어둠 속을 떠다니고 내 몸도 떠오른다
들패랭이 들국 미나리아재비 청도라지……
알 수 없다 그리운 꽃들의 이름을 부르면 왜 황량한 들판이 보이는지 휘청휘청 들을 건너가는 허수아비 보이는지 허수아미 가도 가도 그 자리, 돌아보면 빈 얼굴인지
우물바닥에 누워 가버린 여름의 유리조각 햇살에 가슴을 찔린다「내 죄다 모두 내 죄다」클클 웃었더니 이마에 와 닿는 서늘한 들꽃의 향기, 가만히 눈을 떠보면 허기진 가슴을 채우는 씁쓸한…… 아스피린의……
김형술 시인 / 해바라기
식어가는 땅 위에서의 잠 바람은 빈집의 초인종을 눌러대고 꿈속으로 떨어지는 황금색의 깃털 날갯짓 소리에 잠 깨는 새벽이면
그리운 빈센트 반 고흐 나의 귀를 베어 그대에게 부치나니 머나먼 아비뇽의 언덕 무성한 해바라기의 숲으로 돌아와 다오
들판 가득히 그림자를 드리우는 까마귀떼에 나의 귀를 주고 그대 이제는 모자를 벗어도 좋으리라
지상의 모든 어둠을 껴안고 불꽃으로 타오르는 꽃 속에 서서 그대 이마의 푸른 정맥 형형한 눈빛에 가슴을 데이고 싶다
벽으로 막힌 세상마다 하얗게 별이 떠오는 삼나무의 길을 여는 발자국 소리 그대 천진한 광기를 생각하며
흐트러진 영혼 한 귀퉁이를 다듬어 잘 여문 한 알 불씨를 심는다
나의 뜰에 해바라기 가득히 피는 날 그대를 찾아 다시 먼 길을 나서리라
월간 《현대문학》 1992년 4월호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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