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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지훈 시인 / 古風衣裳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

조지훈 시인 / 古風衣裳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附椽)* 끝 풍경(風磬)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珠簾)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인 양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 부연 : 처마를 뒤쪽으로 올라가게 하여 멋을 내도록 쓰는 짧은 서까래.

* 운혜 : 울이 깊고 작은 가죽신으로 앞 코에 구름 무늬를 수놓음.

* 당혜 : 앞뒤에 당초 무늬를 놓은 여자의 가죽신.

* 호접 : 나비.

 

월간 『文章(문장』 3호, 1939년 4월호 발표

 

 


 

 

조지훈 시인 / 僧舞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빰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나빌레라 : 나비로구나.

 

월간 『文章(문장』 3호, 1939년 4월호 발표

 

 


 

 

조지훈 시인 / 鳳凰愁

 

 

벌레 먹은 두리 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風磬)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登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월간 『文章(문장)』 제13호, 1940년 2월호 발표

 

 


 

 

조지훈 시인 / 香紋

 

 

  성터 거닐다 주워 온 깨진 질그릇 하나

  닦고 고이 닦아 열 오른 두 볼에 대어 보다.

 

  아무렇지도 않은 곳에 무르녹는 옛 향기라

  질항아리에 곱게 그린 구름무늬가

  금시라도 하늘로 피어날 듯 아른하다.

 

  눈감고 나래 펴는 향그러운 마음에

  머언 그 옛날 할아버지 흰 수염이

  아주까리 등불에 비치어 자애롭다.

 

  꽃밭에 놓고 이슬 받아 책상에 올리면

  그밤 내 베갯머리에 옛날을 보리니

  옛날을 봐도 내사 울지 않으련다.

 

월간 『文章(문장)』 제13호, 1940년 2월호 발표

 

 


 

조지훈 [趙芝薰, 1920.12.3~1968.5.17]

1920년 경북 영양에서 출생. 1941년 혜화전문학교 문과 졸업. 1939년 《文章(문장)》에 〈고풍 의상〉, 〈승무〉, 〈봉황수〉 등을 발표하며 등단. 박목월·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불림. 저서로는 시집 『청록집』, 『풀잎 단장』, 『조지훈 시선』, 『역사 앞에서』, 『여운』, 수필집 『돌의 미학』, 『지조론』, 『창에 기대어』, 시론집 『시의 원리』, 학술서 『한국문화사서설』, 역사서 『한국민족운동사』 등이 있음. 1948년 고려대 문과대 교수로 1968년 사망 이전까지 재직.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