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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육사 시인 / 광야(曠野)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3.

이육사 시인 / 광야(曠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서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시집(陸史詩集)』(서울출판사, 1946) 중에서

 

 


 

 

이육사 시인 / 황혼(黃昏)

 

 

  내 골ㅅ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黃婚)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人間)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黃婚)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

 

  저 ― 십이(十二) 성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鐘)ㅅ소리 저문 삼림(森林) 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쎄멘트 장판우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할 가지없는 그들의 심장(心臟)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沙漠)을 걸어가는 낙타(駱駝) 탄 행상대(行商隊)에게나,

  아프리카 녹음(綠陰) 속 활 쏘는 토인(土人)들에게라도,

  황혼(黃婚)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地球)의 반(半)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내 오월(五月)의 골ㅅ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來日)도 또 저 ― 푸른 커―텐을 걷게 하겠지.

  정정(情情)히 사라지는 시내ㅅ물 소리 같아서

  한 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 5월의 병상(病床)에서

 

월간 『신조선』 1935년 12월호 발표

 

 


 

 

이육사 시인 / 路程記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배쪼각  

  여기저기 흐터져 마을 이 한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담 어설푸고

  삶의 틔끌만 오래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어매엿다.

 

  남들은 기벗다는 젊은날이엿건만

  밤마다 내꿈은 서해(西海)를 밀항(密航)하는 「쩡크」와 갓해

  소금에 짤고 조수(潮水)에 부프러 올넛다.

 

  항상 흐렷한밤 암초(暗礁)를 버서나면 태풍(颱風)과 싸워가고

 

  전설(傳說)에 읽어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빈저주도 안엇다.

 

  쫏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오여쌋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믜이양

  다삭어빠진 소라 깍질에 나는 부터왓다.

  머-·ㄴ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너간 생활(生活)을 드려다보며

 

동인지 『자오선』 1937년 12월 발표

 

 


 

 

이육사 시인 /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淸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육사시집(陸史詩集)』(서울출판사, 1946) 중에서

 

 


 

 

이육사 시인 / 광인(狂人)의 태양(太陽)

 

 

  분명 라이풀 선(線)을 튕겨서 올라

  그냥 화화(火華)처럼 사라서 곱고

 

  오랜 나달 연초(煙硝)에 끄스른

  얼굴을 가리면 슬픈 공작선(孔雀扇)

 

  거츠는 해협(海峽)마다 흘긴 눈초리

  항상 요충지대(要衝地帶)를 노려가다

 

 일간  [조선일보(朝鮮日報)] 1940년 4월 27일 발표

 

 


 

 

이육사 시인 / 절정(絶頂)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 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월간 『문장』 12호, 1940년 1월호 발표

 

 


 

 

이육사 시인 / 연보(年譜)

 

 

  '너는 돌다릿목에서 줘왔다'던

  할머니의 핀잔이 참이라고 하자.

 

  나는 진정 강언덕 그 마을에

  버려진 문받이였는지 몰라.

 

  그러기에 열여덟 새 봄은

  버들피리 곡조에 불어 보내고

 

  첫사랑이 흘러간 항구의 밤

  눈물 섞어 마신 술, 피보다 달더라.

 

  공명이 마다곤들 언제 말이나 했나

  바람에 붙여 돌아온 고장도 비고

 

  서리 밟고 걸어간 새벽 길 위에

  간(肝) 잎만이 새하얗게 단풍이 들어

 

  거미줄만 발목에 걸린다 해도

  쇠사슬을 잡아맨 듯 무거워졌다.

 

  눈 위에 걸어가면 자욱이 지리라.

  때로는 설레이며 바람도 불지.

 

월간 『시학』 창간호, 1935년 12월호 발표

 

 


 

 

이육사 시인 / 꽃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잖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 때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육사시집(陸史詩集)』(서울출판사, 1946) 중에서

 

 


 

 

이육사 시인 / 교목(喬木)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간 『인문평론』 1940년 7월호 발표

 

 

 

 

 

 


 

이육사 [李陸史, 1904.4.4~1944.1.16] 시인

본명은 이원록李源祿. 다른 이름으로는 이활李活, 이원삼李源三, 육사肉瀉, 이육사李戮史, 이육사二六四. 경북 안동에서 출생. 부친은 퇴계 이황의 13대손(이가호)이며 모친은 의병장 허형의 딸(허길). 유년기에 조부祖父에게서 소학을 배우고 도산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16세 무렵 대구로 이사. 1921년 결혼 후 백학학원에서 수학.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고등예비학교에서 1년간 재학. 1925년 귀국,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항일단체에 입단. 1926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중국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중퇴하고 귀국. 그해 장진홍 의거(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소. 1930년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입사, 기자활동을 하면서 은밀히 항일활동을 펼치다가 1932년 다시 중국행. 항일활동 인사들과 접촉 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 귀국 후 다시 구속되었다가 석방, 문필활동을 펼치던 중 1943년 피검, 북경으로 압송되어 1944년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 첫작품은「황혼」(『신조선』,1933).「절정」, 「광야」, 「청포도」, 「꽃」, 「황혼」 등의 대표시를 남겼으며, 1946년 비평가인 아우 이원조의 편집으로 유고 시집 『육사시집』 출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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