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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인환 시인 / 거리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4.

박인환 시인 / 거리

 

 

  "나의 시간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

  붉은 지붕 밑으로 향수가 광선을 따라가고

  한없이 아름다운 계절이

  운하의 물결에 씻겨갔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

  지나간 날의 동화를 운율에 맞춰

  거리에 화액(花液)을 뿌리자

  따뜻한 풀잎은 젊은 너의 탄력같이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


  지금 그곳에는 코코아의 시장이 있고

  과실처럼 기억만을 아는 너의 음향이 들린다

  소년(少年)들은 뒷골목을 지나 교회에 몸을 감춘다

  아세틸렌 냄새는 내가 가는 곳마다

  음영같이 따른다


  거리는 매일 맥박을 닮아갔다

  베링해안 같은 나의 마을이

  떨어지는 꽃을 그리워한다

  황혼처럼 장식한 여인들은 언덕을 지나

  바다로 가는 거리를 순백한 식장으로 만든다

  전정(戰庭)의 수목 같은 나의 가슴은

  베고니아를 끼어안고 기류 속을 나온다

  망원경으로 보던 천만(千萬)의 미소를 회색 외투에

  싸아

  얼은 크리스마스의 밤길로 걸어 보내자"

 

1946년 12월「국제신보」 (국제신문 전신) 주간 송지영의 추천으로 발표한 등단시

 

 


 

박인환[朴寅煥, 1926.8.15~1956.3.20] 시인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上東里)에서 출생. 낙원동 입구에서 서점 「마리서사(馬莉書舍)」를 경영. 이때부터 김기림·오장환·김광균(金光均) 등 선배시인들과 알게 되었고, 김수영(金洙瑛)·김경린(金璟麟)·김병욱(金秉旭) 등과 교우관계를 맺음. 1946년 시 「거리」발표. 1947년 시 「남풍」, 산문 「아메리카 시논」을 「신천지」에 발표.

1948년 「마리서사」 경영을 그만 둠. 4월에 동인지 「신시론」창간에 김경린 등과 함께참여. 진명 출신의 이정숙(李丁淑)과 덕수궁 앞뜰에서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뿌림. 1956년 작고후 시집 『목마와 숙녀』와 『박인환 전집』이 간행됨.